반도체 치킨게임 이겨낸 업체들 호황 '교훈'…"원양보다 동북아 해운시장부터 회복해 나가야"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이 지난 5일 정부세종청사 해수부 기자실에서 2017년 업무계획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지난해 5월 개당 12.5달러에 불과했던 D램 모듈 가격은 지난 5 25달러를 기록했다. 1994년에는 IBM과 엘피다 등 25개 기업이 D램을 생산했지만 지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3개 기업만 살아남았다. 설비 증설과 저가 경쟁으로 시작된 D램 치킨게임은 살아남은 기업에게 어닝서프라이즈를 안겨줬다.

 

치킨게임은 대부분 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게임 참가자들은 상대가 먼저 떨어져 나가길 빌면서 설비를 늘리고 가격을 낮춘다. 팔면 팔수록 손해가 누적된다. 견디지 못한 패배자들은 폐업을 택하거나 다른 기업에 회사를 넘겨야 한다. 그러나 치킨게임 승자는 추후 가격 인상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해운업계는 수 년째 지독한 치킨게임을 겪고 있다. 세계 물동량 증가세가 꺾이는 가운데 선사들은 저가운임 경쟁을 펼쳤다. 선사규모 1위 머스크와 2MSC는 대형선박을 확보하는 동시에 선사를 합병해나갔다. 거대해진 양 선사는 저가운임으로 빠르게 점유율을 올려나갔다. 세계 7위였던 한진해운은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세계32위급으로 나가 떨어졌다.

 

올해도 해운업계에선 치킨게임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해양수산개발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7년 선박량은 3.7% 증가하고 1만5000TEU 이상 대형 컨테이너선은 34.7% 증가한다. 대형화와 공급과잉은 여전하다. 하지만 해운을 포기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이 원자재 수출입 99.9%를 해운에 의존하는 사실상의 섬나라서다. 전문가들은 올해를 해운 재건 원년으로 삼고 치킨게임이 끝나는 날을 대비해야한다고 말한다.

 

올해도 부정적인 시황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양수산개발원이 지난 6일 발표한 ‘2017 해운업계 전망 설문조사에 따르면 38.8%가 올해 해운업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답했다. 양창호 인천대 물류교통학 교수는 세계 경제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해운 시황도 좋아진단 전망이 있지만 업계 종사자들은 부정적으로 본다시장 환경이 갑자기 좋아지지 않는 이상 시장 환경만으로는 해운부활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해운 전문가들은 어떻게든 버텨야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다른 선사처럼 M&A를 추진하자니 자본조달이 쉽지 않다. 규모가 작아 인수합병을 주도하기도 어렵다. 전형진 해양수산개발원 해운시장분석센터장은 대형화를 통한 원가 경쟁력 확보가 절실하지만 현재 현대상선과 SM상선 규모로는 어려운 게 현실라며 연안해양부터 차근차근 확보해 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원양보다는 동북아 해운시장부터 차근차근 회복해가자는 의미다.

 

김태일 해양수산개발원 해운정책연구실장은 장기적으로는 대형 컨테이너선사 타깃 육성이 필요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우선 중소형 컨테이너선사부터 제휴를 늘려 덩치를 키우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중소 컨테이너선사 육성을 위해 공동선대운영을 제시했다. 중소형 선사들이 각자 가진 선박을 모아 선박 공유풀(Shipping Pool)을 만들고 공공으로 선대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각 선사는 지분대로 수익을 나눠 갖는다.

 

해운과 밀접한 산업과 협력모델 구성방안도 있다. 김 실장은 해운·조선·​무·금융 상생위원회를 설립해 서로 협력하는 창구를 마련하자고 제안한다. 해운시장조사업체 클락슨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한국 선사의 자국 조선소 발주비중은 72%로 중국(95.1%), 일본(80.4%)에 비해 낮다. 김 실장은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한국 기업들은 여태껏 원가 절감을 위해 해외선사를 주로 이용해왔다라며 그러나 개별 경쟁력이 반드시 우리나라 산업 전체에 유익하진 않다라고 지적했다. 개별 경쟁력을 한국 전체 산업으로 연결시키는 구상이다.

 

◇"위기가 기회"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국제해사기구(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IMO)선박 환경규제와 파나막스(Panamax)급 선박 폐선이 기회라고 말한다. 개조하기보다 폐선하는게 이익인 고연령 선박이 많다는 이유다.

 

IMO2020년부터 전세계 모든 선박 연료유의 황 함유량을 0.5%이하로 줄일 것을 지난해 10월 권고했다. 현행 3.5% 이하보다 대폭 강화된 환경 규제다. 이를 충족하려면 저유황유나 액화천연가스(LNG)를 선박의 주 연료로 사용하거나 저감 장치를 추가로 설치해야 한다. 그는 국내 선사가 보유한 선박중 40%는 개조보다 폐선이 나을 정도로 오래됐다이라며 해운 불황으로 선가도 낮은 지금, 새로운 환경규제에 맞는 선박을 확보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고 말했다.

 

파나막스급 선박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5000TEU급 미만 중소형 선박을 말한다. 파나막스급은 파나마 운하 확장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수요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파나마운하는 지난해 627일 공사를 마무리하고 재개통했다. 확장된 파나마 운하에서는 13000TEU급 대형 컨테이너선이 통과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문가는 파나막스급 폐선은 앞으로도 늘어난다공급과잉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다는게 위안거리라고 전했다.

 

단기 실적 개선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재건 노려야

 

지난해 1031, 정부는 해운업 경쟁력 강화방안을 발표한다. 구조조정 자금과 선박대출 자금을 지원하고 공동선박 발주로 수요를 창출하는 게 골자다. 또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한국자산공사가 출자해 한국선박투자회사를 세우는 방안도 담겼다. 한국선박투자회사는 선사로부터 배를 구매한 뒤 배를 빌려주는 과정을 통해 해운사에 유동성을 공급한다.

 

전문가들은 정부자금 투자보다 민간 투자를 늘리는 게 중요하단 입장이다. 김태일 연구실장은 해운업 경쟁력 강화방안은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일시적인 자금 지원에 불과이라며 지속적으로 민간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민간자본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어려워 보인다. 전형진 센터장은 공급과잉 시장에 누가 투자를 할지 의문이다새로운 수요를 찾거나 공급 축소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단기간 회복은 어렵다고 말했다.

 

한 전문가는 한국해운 신인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오너리스크에 주목한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은 전 지난해 4월 한진해운이 채권단공동관리(자율협약)를 신청하기 직전 미공개정보를 이용해 보유 중이던 한진해운 주식 96만여주를 팔아 약 11억원의 손실을 피한 혐의를 받고 있다. 최 전 회장은 2006년 남편인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 사망한 후부터 한진해운을 맡아 경영하다가 부실이 심화하자 2014년 한진그룹에 경영권을 넘겼다.

 

현정은 전 현대상선 회장 역시 현 회장 동생 가족에게 일감몰아주기를 한 사실이 확인돼 과징금을 물기도 했다. 현 회장이 현대상선 자율협약과정에서 300억원을 내놓긴 했다지만 회사가 입은 손해와 비교해보면 부족한 금액이다. 특히 지난해 자율구조조정 과정을 통해 현대상선 대주주로 올라선 산업은행 우려가 크다. 산업은행은 정부 지분이 100%. ‘낙하산인사’, ‘보은 인사공수부대란 오명을 얻은 제2의 대우조선해양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그는 해운업계 대외신인도를 회복하고 오너리스크를 극복하는 건 올해가 적기”라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업계와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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