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업소 "전장부품 영향, 보증수리 안된다" 황당 거부…전문가들 “제작 결함 숨기려는 작태”
“사고 처리 필수품인데, 블랙박스를 달지 말라는 소린가?”
경기도 수원시에 사는 서영모(가명·38) 씨는 지난해 10월 차량 핸들 잠김 결함에 대한 보증수리를 위해 정비 사업소를 방문했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차량 정비 사업소가 조향장치 무상 수리 대상 차종은 맞지만, 블랙박스 설치 차량에 대한 부품 보증을 해줄 수 없다며 보증수리를 거절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서 씨는 곧장 블랙박스를 떼어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비 사업소 담당 직원은 “블랙박스가 부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답했다. 서 씨는 “보험료 인하나 사고처리에 있어 블랙박스는 필수품이 됐는데 보증수리에서 블랙박스를 문제 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처사”라고 토로했다.
자동차 누적 등록 대수 증가와 함께 덩달아 늘어나고 있는 자동차 사고에 있어 블랙박스가 주행 안전 감시자로 역할 하고 있지만, 차량 보증수리에서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완성차 업체가 블랙박스를 설치한 차량에 대한 보증수리를 거절하고, 결함 원인조차 블랙박스로 지목하고 있는 탓이다.
6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국내 완성차 업체 대부분 정비 사업소가 블랙박스를 보증수리 거절 항목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한국GM 한 정비 사업소는 최근 보증 공지 사항을 공개하고 블랙박스 설치 시 결함 부품 보증수리가 불가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주변 전장부품 및 내·외장 부품의 품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GM 정비 사업소 관계자는 “보증 항목에 포함되는 배터리나 전자제어장치는 블랙박스 전원장치와 충돌이 불가피하다”면서 “정비기술지원담당 보증팀에서 보증수리 거절 항목을 지정해 뒀다”고 말했다.
수입차 업체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9월 국토교통부가 BMW 일부 차종의 연료 호스 균열로 인한 화재 가능성으로 13개 차종 1751대에 대한 시정 조치(리콜)를 발표했음에도 BMW코리아 측은 지속해서 불법개조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블랙박스 배선 불량 등이 화재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병일 자동차 명장은 “블랙박스가 전원을 가져다 쓰는 것으로 전장부품 결함 및 화재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면서 “최근 들어 블랙박스 전력 사용량도 대폭 줄어 상시녹화 기능을 사용한다손 치더라도 차량에 무리를 주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자동차 회사가 전장부품 보증수리를 거부하는 만능 해결키로 블랙박스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는 블랙박스를 설치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려운 사고에 대비해 자동차 블랙박스 기록 영상이 유용한 증거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험사는 차량 블랙박스 확인을 통한 사고처리 효율성을 들어 블랙박스 특약이라는 이름으로 보험료 산정 시 3~4%가량 보험료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2500만원인 40세 남성의 차량 보험료가 80만원일 때 블랙박스를 달면 4%가 할인돼 3만2000원이 절약된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블랙박스의 필요는 단순 보험료 절감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면서 “주차된 차의 훼손에 대한 수리 요구와 CCTV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범죄행위 등 사회적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에서도 블랙박스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객 감사 명목으로 자동차 제조사가 블랙박스를 증정하면서도 보증수리는 거절하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쌍용차는 이달 코란도 스포츠나 티볼리브랜드 구매 고객이 세이프티 저리 할부 이용 시 추가로 2채널 블랙박스를 증정한다.
이외에도 판매 영업직원은 개별적으로 신차 구매 고객에게 판매조건에 더해 블랙박스 설치를 제공하고 있다. 10만~30만원 상당의 블랙박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차량 가격 할인에 더한 추가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재규어랜드로버 판매 전시장에서 일하는 한 영업직원은 “저를 찾아주신 고객께 블랙박스 설치는 무조건 제공해드린다”면서 “어차피 달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블랙박스를 보증수리 거절 항목에 포함하는 것은 완성차 업체의 제작 결함과 같은 치부를 가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국내에 등록된 자동차 중 절반 이상이 블랙박스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블랙박스가 결함 원인을 제공한다면 블랙박스 사용에도 차량 결함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게 완성차 업체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