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고용부, 지나치게 보수적"…국회는 방임

지난해 5월30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역 9-4번 승강장에서 사고를 당한 김모(19)씨를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김 씨는 지난 28일 오후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의 고장난 안전문(스크린도어)을 고치다 역사로 들어오는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여 숨졌다. / 사진=뉴스1

 제2의 구의역 사고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조치는 다시 구호에 그쳤다. 공무원 집단의 소극적 대응과 국회의 방임 탓이다.

 

지난해 5월 28일 서울 광진구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9세 하청노동자가 들어오는 지하철을 피하지 못해 숨졌다. 이후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 위험 업무가 하청노동자들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해가 바뀔 때까지 법안은 상임위원회인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정부와 여당이 야당 법안을 받을 수 없다며 버티고 있는 탓이다. 이 가운데 정부가 지난 2일 동법 시행규칙을 일부 보완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으려해 빈축을 사고 있다. 

 

환노위는 쟁점법안을 제껴놓은 채 무쟁점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지난해를 마감했다. 1, 2월 임시국회가 열릴 예정이지만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논의되리라는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은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법이 바뀌어야 한다며 국회가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험업무 하도급 원천 금지” vs. "하도급 규제 일부 강화“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심상정 정의당 의원, 김동철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해 각각 위험의 외주화 관련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부도 지난달 29일 뒤늦게 같은 법 개정안을 내놨다.

 

그런데 산안법 개정안을 두고 정부여당과 야당의 입장차가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어 논의가 진척되지 못했다. 하도급을 금지할 업무범위와 내용이 개정안의 핵심이다.


개정 강도가 가장 약한 건 정부안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안전, 보건상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을 수행하는 수급인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특정 업무의 경우 수급인에게 안전, 보건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정부안은 산안법이 정보제공 의무를 부과하는 기존 20개 업무에 더해 질식 또는 붕괴의 위험이 있는 작업에 대해서도 정보제공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이다.

한정애 의원과 심상정 의원 안은 위험의 외주화 우려가 있는 업무에서 하도급을 아예 금지하자는 내용이다.

한정애 의원안은 ▲유해하고 위험한 작업으로서 도급인의 사업장에서 상시적으로 행하여지는 사내하도급을 전면 금지하고 ▲일시적이고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거나 도급인의 사업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에 대해서는 고용노동부장관의 인가를 받아 도급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한 의원은 지난해 6월 해당 법안을 발의하면서 “산업재해가 발생하기 쉬운 유해하고 위험 작업에 대한 ‘위험의 외주화’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고, 이로 인해 도급인의 사업장에서 수급인의 근로자들이 사망하는 산재사고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현행법은 도급 사업주의 책임을 소극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일부 규정된 안전, 보건조치 책임도 명확하지 않아 수급인의 근로자를 보호하기에는 미흡한 실정”이라고 밝혔다.

심상정 의원이 발의한 산안법 개정안도 이와 유사하다. 그가 발의한 개정안은 ▲안전ㆍ보건상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 도급을 금지하는 작업에 국민의 안전·생명과 밀접한 철도, 원전 등 유지보수 업무와 유해화학물질 관리법 제2조제7호의 사고대비물질을 포함하고 ▲도급사업 시 도급인의 안전, 보건 관련 정보제공 의무를 모든 업무에 부과하자는 것을 골자로 한다.

심상정 의원은 한정애 의원과 같은날 법안을 발의하면서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 도어 수리현장 사고에서 보듯이 산업현장에서 사내하청ㆍ파견ㆍ도급 등 다양한 형태의 고용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안전ㆍ보건에 대책은 거의 유명무실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도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그동안 지하철 사고, 불산 누출사고, 원전사고 등 사회적 중대사고가 터질 때 마다 ‘위험의 외주화’에 대해 경고해왔고, 안전과 관련된 작업자들의 도급형태 고용을 금지하고, 원청에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관련 법안들이 발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리되지 않았다. 이번 20대 국회에서 시급히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쟁점 법안만 처리하고 막 내린 환노위

그렇지만 정치권의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동안 지하철 사고, 불산 누출사고, 원자력발전소사고 등 중대사고가 터질때마다 위험의 외주화 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고, 관련 법안들이 발의됐지만 처리되지 않았다. 기업과 노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국회에서도 공방만 벌일 뿐 대안을 마련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엔 환노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산안법 개정안을 포함해 쟁점법안들은 논의순서가 뒤로 밀렸다. 결국 환노위는 두차례 걸친 전체회의에서 무쟁점법안만 처리하는 데 그쳤다.

상황이 이런데도 고용노동부는 현행법의 시행규칙만 일부 고친 채 한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바뀐 시행규칙은 도급인이 하청노동자에게 안전, 보건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는 업무에 양중기와 철도를 포함하는 내용이다.  

상임위에서 논의될 법안의 순서는 여야 간사의원들이 결정한다. 산안법 논의순서가 뒤로 밀린 이유에 대해 여야 간사는 모두 같은 입장이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삼화 국민의당 의원, 하태경 전 새누리당 의원 측은 모두 “산안법보다 중요한 법안들이 많아서 산안법 논의순서가 뒤로 밀렸다”고 답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위험의 외주화를 막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가장 시급한 노동 현안”이라면서 “1, 2월 임시국회에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한다. 의원입법은 논의과정에서 폭이 다듬어질 필요도 있지만 고용노동부가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논의가 안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도 “한국은 OECD회원국 중 산업재해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라면서 “외국에서 시간제나 파트타임 형식 근로형태는 있어도 도급, 용역형태는 많지 않다. 다른 건 OECD를 인용하면서 왜 노동에 관한 한 OECD와 그 산하기구인 ILO 기준을 따르지 않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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