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삼성SDI·현대차 이유 모를 배터리 규제에 난처…“을 입장 벗어날 수 있는 기술수준 갖춰야”
220V 플러그는 더 이상 스마트폰 충전기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버지가 타는 중형 세단은 주유소가 아닌 가정용 충전기를 이용해 동력을 채운다. 자동차는 검은 매연도, 시끄러운 엔진소음도 없다. 이런 ‘꿈같은’ 상황이 곧 현실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테슬라부터 GM, 도요타와 혼다, 현대·기아자동차가 전기자동차를 출시했거나, 양산을 준비 중이다. 본 기획에서는 올해 전기자동차 시장의 핵심 이슈, 국가별 쟁점,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화두 등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중국 전기차 시장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는 빨간 딱지다. 한국산 전기차는 팔기도 사기도 어렵다.”
중국 베이징에서 자동차 매매상을 한다는 양천(31)씨는 한국 전기차 산업 미래를 묻는 질문에 이 같이 답했다. 그는 중국산 전기차를 일류, 미국산 전기차를 이류, 한국산 전기차를 삼류라고 표현했다. 양천씨의 이 같은 표현은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가 아니다. 실제 중국시장 내 한국 전기차에 대한 인식이 그렇다.
과거 한국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을 비하했던 현상이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국산 전기차에 대한 불신현상이 중국 내 팽배해지고 있다. 자국 전기차에 비해 기술수준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다. 여기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문제까지 겹치며 중국 내 반(反) 한국산 전기차 풍조가 고조되고 있다.
전기차를 차세대 먹거리로 지목한 한국 배터리·완성차기업은 중국 시장 진출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중국의 막대한 전기차 수요를 무시해서는 미래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결국 변덕과 질투가 심한 ‘미운 일곱 살’ 같은 중국 전기차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중국 전기차 기술을 한 수 아닌 세 수 이상 뛰어넘는 ‘혁신’만이 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 ‘규제 만리장성’에 우는 국산 전기차기업
전기차 시장에서 한국은 철저히 아류다. 홈그라운드인 내수 전기차 수요가 작다보니, 국내 완성차사 전체 판매량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떨어진다. 국내 전기차 판매는 전체 자동차 판매량의 0.2% 수준에 그친다. 이렇다보니 국내 완성차사들은 내수시장에 전기차를 적극적으로 선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은 다르다. 13억명에 이르는 인구가 내수시장을 든든히 받치고 있다. 2015년 기준 중국 전기차 시장점유율은 34.4%다. 세계 1위다. 2위인 미국(20.9%)보다 13.5%포인트 앞선다.
중국 전기차시장은 2014년 이후 매년 300% 이상 고속 성장하고 있다. 전기차 기술수준, 전기차 부흥정책 등 정경(政經) 모두 한국 보다 중국이 앞서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한국 전기차 관련 기업들이 중국을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장 내수시장에서 전기차 경쟁력을 실험해볼 수가 없다보니, 전기차 최대 수요지인 중국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를 제조하는 삼성SDI, LG화학, 현대·기아자동차 등이 중국 시장 진출을 타진하는 대표 기업으로 꼽힌다.
문제는 중국이 이 같은 상황을 이용해 ‘갑질’을 시작했다는 데 있다. 자신들의 전기차 시장 파이(pie)를 떼어가기 위해서는, 산업 외 정치적 요구도 따라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중국 공업화신식부가 지난달 29일 발표한 ‘신에너지 자동차 보조금 지급 차량 5차 목록’ 493개 차량 모델 중 한국 업체 배터리를 장착한 차량은 포함되지 않았다. 당초 이날 오전 발표된 목록에는 95개사 498개 모델이 포함됐다. 그러나 돌연 오후에 5개 모델을 제외한 수정안이 공지됐다.
목록에서 빠진 5개 모델은 둥펑자동차의 전기 트럭과 상하이 GM의 캐딜락 하이브리드 승용차 등으로 삼성SDI와 LG화학의 배터리가 장착됐다.
중국 정부는 전기차에 사용되는 리튬이온 전지 생산기업의 연간 생산능력을 8GWh(기가와트시) 이상으로 높여야 배터리 모범기준을 통과시켜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또 중국 정부는 최근 2년간 전기차 배터리 관련 사고가 없어야 한다는 기준도 제시했다. 국내 기업은 넘기 힘든 문턱이다. 이를 충족할 중국 업체도 BYD와 CATL 단 2곳 뿐이다.
국내 배터리업계는 한국 기업의 중국 배터리 모범기준 탈락은 ‘정치 보복’이라고 항변한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조처라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제시한 전기차 배터리 모범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중국 업체 제품은 목록에 포함됐지만, 한국 업체 배터리를 탑재한 차량만 전기차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빠졌다는 게 이 같은 추측 배경이다.
◇ 정부, 맞대응 자제해야…중국 포기해서는 미래 없어
중국 당국의 ‘돌발 행동’에 한국 전기차 관련 기업은 난처한 입장이다. 당장 중국 사업 철수는 고려대상이 아니다. 다만 중국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조처 앞에 묘수를 찾기 힘들어하는 눈치다.
LG화학 관계자는 “연휴 동안 나온 소식에 그룹 전체가 비상이 걸렸다. 중국 정부가 이처럼 노골적으로 정치 보복에 나설지 몰랐다”며 “그룹사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중국 소식통을 이용해 해결방안을 찾고 있지만 당장 뚜렷한 대응책을 내놓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지난해 친환경차 브랜드인 아이오닉을 출시한 현대자동차는 눈치만 보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하반기 미국과 유럽에 전기차 모델인 아이오닉 일렉트릭을 출시했다. 그러나 중국은 출시 시점이나 생산계획 등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는 차세대 전기차 모델에 탑재될 배터리 개발을 위해 LG화학과 SK 등과 관련 기술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현대차 남양연구소 관계자는 “전기차 배터리에서 만큼은 그룹이 ‘순혈 주의’를 버리고 타사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분위기”라며 “그런데 LG화학 등이 중국 규제 문턱에 허덕인다면 그룹입장에서는 중국산 배터리라도 탑재하려고 할 것이다. 중국 시장을 놓쳐서는 전기차로 수익을 내기 어렵다”고 밝혔다.
업계 일각에서는 정부 차원의 항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중국 자동차들이 올해부터 승용차와 전기차로 한국 시장 진출을 확대하는 만큼, 한국 정부가 ‘을’의 입장에만 놓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 최대 전기차 회사 비야디(BYD)는 올해부터 국내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다. 2015년 10월 한국 법인 설립 등기를 마친 비야디는 15인승 이하 전기버스를 갖고 들어올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상용차 점유율 1위인 포톤(FOTON)도 올해 국내 전기버스 시장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2일 익명을 요구한 개혁보수신당(가칭) 한 의원은 “중국 정부가 규제를 근거로 한국기업을 압박한다면, 정부 역시 중국 자동차기업에 대한 보조금 축소 등으로 맞불을 놔야 한다”며 “가만 앉아 당할 이유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전기차 시장에서는 중국과의 맞대응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경제를 시장 아닌 공산당이 좌우하는 만큼, 중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는 중국과 대화 물꼬를 닫지 않되, 기업은 BYD 등 중국 전기차업체의 기술수준을 뛰어넘는 혁신을 시도하는 ‘투 트랙’ 전략을 시도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국내 전기차 관련 기업에게 있어 중국시장은 필수적으로 진출해야 하는 곳이지만, 중국 전기차기업에게 한국의 협소한 시장은 테스트베드 정도”라며 “전기차 시장규모와 기술수준 모두 한국은 중국에 밀린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치보복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당장은 어렵지만 중국이 요구하는 과도한 규제기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술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결국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