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목표 지난해보다 12만대 늘어난 825만대 …최순실 게이트에 ‘애국심‘ 빠지고 ’투명 경영‘ 등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올해 경영 핵심키워드로 ‘미국’, ‘자율주행’, ‘통합 신사옥’을 강조했다. 지난해 신년사에서는 중국시장과 친환경차, 제네시스 등을 화두로 던진 바 있다. 현대·기아차 판매목표는 지난해보다 12만대 늘어난 825만대라고 밝혔다.
정 회장은 지난해와 달리 신년사에 그룹 공치사 분량을 대폭 줄였다. 지난해 신년사 마지막에 언급했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갖자”는 부분도 삭제됐다. 대신 투명경영을 숙제로 던졌다. 최근 악화된 실적과 ‘최순실 게이트’ 연루 탓에 잔뜩 가라앉은 회사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 907자에서 708자로, 줄어든 ‘칭찬’
“지난 한 해 동안 어려운 시장 여건에도 불구하고 전년에 이어 800만대 이상의 판매를 달성한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2015년은 현대·기아차가 세계 5위 메이커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현대제철은 사업구조 개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의미 있는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2016년 신년사)
“지난 한 해 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회사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신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2017년 신년사)
현대자동차그룹은 2일 2017년 경영방침을 담은 신년사를 발표했다. 현대차그룹이 창사 이래 최초로 계열사별 대표이사 주재로 시무식을 연 가운데, 정 회장은 양재동 사옥에서 열린 현대차와 기아차 시무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회사 내부망에 올린 신년사를 통해 경영 포부를 드러냈다.
올해 현대차그룹 신년사 총 분량은 708자(공백 제외)다. 지난해(907자)와 비교해 200자 가까이 줄었다. 사라진 분량 대부분이 지난 한해 그룹 공적을 기리는 공치사다. 즉, 지난해와 비교해 정 회장은 칭찬에 인색했다.
작년 정 회장은 신년사 도입부에 숫자를 강조했다. 2015년 현대·기아차 판매량이 800만대 이상을 기록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세계 5위라는 순위도 언급했다. 구체적 수치를 제시했다는 것은 실적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해 현대·기아차 판매량은 당초 목표였던 813만대 달성은 물론 800만대 돌파도 어려워보인다. 작년 현대·기아차 1~11월 글로벌 누적판매 대수는 706만8013대로 전년 동기(719만1373대) 대비 1.7% 감소했다.
지난달 실적에 따라 800만대 판매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100만대 가까운 실적을 올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2년 연속 연간 판매목표 달성 실패는 물론, 3년 만에 글로벌 판매량 800만대 미만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정 회장 역시 이 점을 의식해 신년사에 구체적 수치는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중국 대신 미국, 트럼프發 위기론 의식
“최근 세계 경제는 중국의 경기 둔화와 저유가, 미국 금리 인상에 따른 신흥 시장의 불안 등으로 저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2016년 신년사)
“최근 세계 경제는 저성장 기조가 지속되는 가운데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자동차 산업 경쟁 심화에 따라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2017년 신년사)
정 회장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 역시 저성장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관측했다. 다만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이 다르다. 지난해 정 회장은 중국의 경기 둔화와 저유가, 미국 금리 인상 미 신흥시장 불안을 세계 경제 ‘폭탄’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올해는 보호무역주의 확산이 경제 불확실성을 높일 것으로 예측했다. 특정 국가를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업계에서는 정 회장이 올해 백악관에 입성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한다.
트럼프는 후보시절부터 줄곧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를 외쳐왔다. 핵심공약이 ‘러스트벨트’(Rust Belt·쇠락한 중서부의 제조업 지대) 부활이다. 즉, 자국 제조업을 살리기 위해 수입 관세장벽을 높이고 기존 FTA 협상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얘기다.
미국에서 판매하는 주요 자동차 업체의 현지생산 비중은 2015년 기준 약 67.5%다. 포드, 혼다, FCA는 각각 93.4%, 80.0%, 78.1%로 미국생산 비중이 높다. 반면 현대·기아차는 54.5%다. 경쟁사 대비 현지생산 비중이 현저히 낮다. 미국이 보호무역을 강화한다면 현대·기아차가 경쟁사보다 타격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권순우 SK증권 연구원은 “트럼프가 멕시코 관세 인상을 주장하고 있다. 현대차보다는 멕시코 공장으로 인한 기아차에 대한 우려가 큰 상황”이라며 “트럼프가 부품에 대한 제재까지 가한다면 멕시코에 진출한 기아차 동반진출업체도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 ‘국가’ 빠지고 ‘투명경영’ 강조…최순실 게이트 의식했나
“끝으로, 2016년 희망찬 새 아침을 맞이하여 국가와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금년 목표한 ‘글로벌 813만대 생산·판매’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실 것을 다시 한번 당부 드립니다.”(2016년 신년사)
“끝으로,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올해 목표한 ‘글로벌 825만대 생산·판매’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2017년 신년사)
정 회장은 지난해 신년사 마지막부분에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신년사 발표 한 달 전인 2015년 12월 9일 진행됐던 제네시스 대형 세단 EQ900 출시행사에 황교안 국무총리(現 대통령 권한대행)가 참석한 게 정 회장의 ‘애국 신년사’ 배경이 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당시 황 총리는 축사를 통해 “자동차 산업은 우리가 이룩한 산업화의 기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변화와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최근 불거진 ‘최순실 게이트’에 그룹사가 연관된 게 신년사 변화 배경이 됐을 것으로 관측한다. 현대차는 청와대 청탁을 받고 최순실 측근회사인 KD코퍼레이션과 플레이그라운드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정 회장이 국조특위 청문회장에 불려가 의원들로부터 호통을 듣기도 했다.
이 밖에 현대차는 신년사를 통해 ‘자율주행’, ‘통합 신사옥’을 올해 핵심 화두로 던졌다. 최근 현대차는 KT와 `5G 자율주행차 기술 공동 개발`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동 구 한전부지에 짓고 있는 통합 신사옥은 최근 서울시와 강남구 갈등에 따른 문서상 불편에 이어 종교단체 시비 등 악재가 이어지며 착공 일정이 당초 예상보다 늦춰지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올해 경영 환경이 녹록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현대차그룹만이 아닌 자동차산업 전체가 처한 위기”라며 “품질 및 브랜드 가치 제고에 더욱 매진하는 한편 R&D 역량을 지속적으로 강화하여 미래 성장기반을 공고히 구축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