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시장 환경 악화에 거세지는 마이너3사 신차공세…“현장경영 어렵다면 승계문제 재점화될 것"
예측 불가다. 자동차 시장 경쟁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미국 신정부 출범으로 글로벌 정치·경제가 요동치고 있고, 현대·기아차가 독점하던 내수시장은 마이너 3사 공세로 균열이 일고 있다. 자동차사 최고경영자(CEO)들은 각사가 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숙제를 풀어내야만 한다. 반격에 실패한다면 CEO의 거취와 사운이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 다가오는 정유년(丁酉年) 국내 자동차사가 처한 상황과 난국을 헤쳐나갈 CEO들의 역량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겐 힘든 한해였다. 신흥국 경기침체 탓에 해외 판매량은 연일 내리막이다. 야심차게 내놓은 신차는 낙제점을 못 면했다. 쾌속질주 하던 내수 판매량이 추락하면서 ‘마이너 3사’(르노삼성·한국GM·쌍용차)는 ‘메이저’ 현대·기아자동차 상대가 될 수 없다던 불문율은 무참히 깨졌다.
여기에 정 회장이 강조하던 품질경영은 이른바 ‘리콜 은폐 논란’ 앞에 금이 갔다. 한해를 갈무리할 시기엔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며 국회의원들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업계는 정 회장의 내년 행보에 주목한다. 그룹 상황이 악화일로인 탓에 국내 자동차사 최고령 최고경영자(CEO)인 정 회장이 현안을 적극적으로 챙기지 못할 경우 리더십에 금이 갈 수밖에 없다
◇ 과제 산적한 ‘역대급’ 해외 시장 상황
내년 현대차그룹이 마주한 해외 시장 환경은 모두 좋지 못하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처한 경영환경을 ‘역대급’(역대의 그 어떤 것보다 최고라는 의미로 만든 신조어) 가시밭길이라고 표현한다. 올해 현대자동차 그룹 해외법인장 회의 내용에 업계 이목이 쏠린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지난 15일부터 20일까지 양재동 본사에서 각각 하반기 해외법인장 회의를 실시했다. 현대·기아차 해외법인장 총 50여명이 참여해 지역별 실적과 주요 현안을 점검하고 내년 생산·판매 전략을 논의했다.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른 건 미국과 중국시장이다. 미국은 ‘러스트벨트’(Rust Belt·쇠락한 중서부의 제조업 지대) 부활을 외쳐온 트럼프가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다. 트럼프는 자국 제조업을 살리기 위해 수입 관세장벽을 높이고 기존 FTA 협상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혀왔다.
현대·기아차가 국내 공장에서 생산해 미국에 내다파는 자동차만 연간 60만대다. 자동차관세가 높아진다면 가격경쟁력 추락이 불가피하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법인장 회의를 통해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불확실성 및 신흥시장 경기 침체 등 위기 대응 시나리오를 수립했다”고 밝혔다.
현대·기아차 북중미지역 법인장들은 내년 미국의 수요 하락 대응방안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자동차시장은 올해 소폭(0.1%) 성장하며 최대 수요를 기록했다. 그러나 내년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할부시장 위축 및 소비심리 악화 등으로 인해 내년 시장규모가 0.1% 축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인 중국은 내년 성장세가 둔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해 중국은 구매세 인하 정책(10%→5%)으로 수요가 증가하며 글로벌 자동차 시장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내년 중국 정부가 구매세 인하 폭을 축소(10%→7.5%)할 것으로 예고돼, 자동차 시장도 위축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 어려워진 ‘삼현주의’…승계 작업 본격화할까
현대차그룹은 내수시장에서도 고전하고 있다. 한국GM ‘올 뉴 말리부’와 르노삼성 ‘SM6’가 중형세단 쏘나타 판매량을 추락시켰고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부문에서는 르노삼성 ‘QM6’ 탓에 싼타페 판매량이 부침을 겪었다. 이에 지난 11월에는 현대차그룹 출범 이후 처음으로 내수시장 점유율이 60%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마이너 3사 공세는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GM이 준중형세단 ‘크루즈’를 준비하고 있고, 르노삼성은 ‘SM4’ 출시를 검토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신형 쏘나타와 G70, 신형 그래저 등으로 판매방어에 나선다는 계획이지만, 주력모델인 아반떼 판매하락을 막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이 침체기를 겪으면서 정몽구 회장의 역할론도 부상하고 있다. 신차 부진 외 내수부진을 부추긴 원인으로 품질문제로 인한 브랜드 신뢰도 하락이 꼽힌다. 이를 타개할 방법으로 정 회장의 '삼현주의(三現主義)' 경영철학이 대두된다. 삼현주의는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현장에서 느끼고, 현장에서 해결한 뒤 확인까지 한다'는 뜻이다.
20일 현대차의 한 전직 부사장은 “정 회장은 신차가 나오면 자동차 소음 하나 실밥하나까지 꼼꼼히 챙겼다. 직원들로서는 까다로운 리더지만 이런 경영철학이 현대차 품질 향상에는 큰 도움이 됐다”며 “최근 리콜 은폐 논란 등이 발생했는데 이럴 때일수록 그룹 수장의 현장 확인이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주요 신차발표회 역시 정 회장이 아닌 영어 발표능력이 출중한 정의선 부회장이나 부사장급이 챙길 가능성이 높다. 정 부회장은 내달 미국을 방문해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 2017과 디트로이트모터쇼를 잇달아 찾아 미국 생산 및 판매법인을 방문하고 시장상황을 점검할 예정이다. 현장을 찾는다는 삼현주의를 정몽구 회장이 아닌 정의선 부회장이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산적한 현안들을 정 회장이 직접 챙기기 어려워짐에 따라, 내년 승계 작업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 회장이 현재 보유한 현대차(5.17%), 현대모비스(6.96%) 지분을 아들인 정 부회장에게 넘기는 작업이 서서히 시동을 걸 수 있다는 분석이다. 내년에도 정 회장이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그룹의 순환출자 구조 해결에 나서지 못한다면, 주주 불신이 심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주식회사에서 승계를 공식화 할 것이라면 구(舊) 수장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는 불안감만 커진다”며 “아버지 정몽구 회장이 물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정의선 부회장이 부각되면 된다면 그룹 위기 상황을 더 키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