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실세들, 한류 포장 내세워 문화‧체육 이권 눈독
올해는 한류가 스무 돌을 맞은 동시에 한류라는 단어가 정치‧사회면 뉴스에 가장 많이 등장한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비선실세 게이트 한복판에 전가의 보도처럼 한류가 등장한 탓이다. 시작은 미르재단이었다.
지난해 10월 27일 재단법인 미르는 서울 강남구 학동로 재단 사무국 앞에서 현판식을 갖고 “한류는 한국 기업과 제품의 해외진출이나 이미지 제고에 기여하고 있고, 그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며 “우리나라 산업을 이끄는 대표 기업들의 참여로 문화와 산업의 동반 해외진출이 활성화되고, 문화융성과 창조경제의 시너지가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미르는 이날 낸 자료를 통해 “미르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브랜드화하는 ‘신(新) 한류’를 창출하고 세계적으로 ‘코리아 프리미엄’ 분위기를 조성해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당장 눈길을 끄는 단어들은 역시 한류와 문화융성, 창조경제다. 화려하게 나열된 단어들은 재단을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하지만 내용은 헐거웠다. 텅 빈 수레였다.
미르재단 의혹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9월 기자와 만난 한 한류사업 관계자는 “처음에 한류 관련 재단에서 일한 사람들이 자문도 해준 것으로 안다. 결국 설립 당시에는 현안과 관련된 전문가가 끼지 않았다. 문화산업과 콘텐츠 쪽에서 경험을 쌓은 이들이 없어서 운영이 잘 안될 것 같았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른 결과는 5000만 국민 모두가 알게 됐다. 국내를 대표하는 대기업들로부터 ‘신한류’를 명분 삼아 486억원의 출연금을 ‘사실상 강제’ 모금한 이 재단은 채 한해가 안지나 정국 게이트의 한복판에 섰다. 재단을 사실상 좌지우지한 최순실(60), 차은택(47)씨와 모금에 적극 관여한 안종범(57)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모두 구치소 신세를 지고 있다.
이 범죄행위의 동력은 결국 대통령 권력일 수밖에 없다. 검찰의 칼날도 대통령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모양새다. 18일 검찰은 박 대통령에 대해 “고발이 된 상황이고 구속된 사건 피의자 범죄 사실에 대해 중요한 참고인이자 범죄 행위가 문제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방점은 ‘범죄 행위’에 찍혀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미르와 쌍둥이로 불린 ‘K스포츠재단’이 내세운 설립 명분도 ‘창조경제와 창조문화’다. K스포츠재단은 대통령 순방 중 열린 ‘한류행사’에도 참석했다. K스포츠재단은 박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에 맞춰 열린 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 문화공연에 태권도 공연 시범단으로 참석했다. 문체부가 이 행사에 관한 보도자료에서 내놓은 제목은 ‘한류, 아프리카로 가다’이다.
실무자들은 ‘강제모금’ 과정에서 전가의 보도인 ‘한류’를 또 내세웠다. 정현식(63)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과 최순실 씨 측근인 고영태 씨 등이 롯데 측을 찾아가 내세운 모금 명분은 “경기도 하남시 한류 스포츠 선수 체육센터 건립 후원”이었다.
한국판 ‘디즈니랜드’라는 낯 뜨거운 수사까지 보도과정에서 나온 CJ그룹의 ‘K컬처밸리’도 명분은 ‘한류테마파크 건립’이었다. K컬처밸리의 상위 사업 격인 문화창조융합벨트는 ‘한류 거점’을 내세웠다. 한류가 ‘마법의 이름’이 된 셈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그동안 한류가 변신을 거듭하며 무한확장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이미 이명박 정부 말기에도 제기됐었다.
문화연대 공동대표인 원용진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2012년 쓴 ‘한류정책과 연성국가주의’를 통해 “장르 확장으로 한류라는 용어의 규정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영화, 드라마에 이어 K팝으로 그리고 그에 따르는 화장품, 화장술, 의상,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 음식, 제조품까지 한류에 포함시키려는 욕망들이 꿈틀대고 있다”며 “수출품 일반을 한류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일도 쉽게 벌어지는 것으로 보아 한류는 이제 ‘made in Korea’의 번역어처럼 받아들여지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행태가 이 정부 들어와서는 되레 비선실세 이권개입의 매개노릇을 했다는 데 있다. 이목은 자연스레 박근혜 정부 국정기조인 ‘문화융성’으로 쏠린다. 최순실, 차은택 씨 등이 이 기조를 지렛대 삼아 한류를 ‘마법의 포장지’로 내세워 이권사업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류는 정부당국과 그 산하기관에도 널따랗게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공공기관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정부의 문화융성 집착’을 자주 느꼈다는 증언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이 정부 들어) 문체부 실무자급 공무원들이 산하기관 보고서나 리포트에서 ‘문화융성’이나 ‘한류’라는 단어가 나오면 굉장히 민감하게 살펴본다. 특히 정부에 비판적으로 쓰인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고 전했다.
사태가 국정농단으로 번지자 현장 문화예술인들도 허탈해하는 분위기다.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예술행동위원회는 지난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융성 등 국가 문화정책의 슬로건은 오로지 최순실, 차은택의 사익을 위한 허울 좋은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노순택(45)씨도 9일 서울문화재단 주최 토론회에 나와 “사회가 꽉 막혀있을 때 그것을 깨는 돌파구 역할을 문화예술이 해야 한다”며 “지금 국정농단의 핵심영역이 문화예술이기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도 이름을 한 문화계 인사는 기자에게 “나 같은 사람이 이름을 올렸다는 게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며 “문화는 그동안 권력과 경제발전의 도구 노릇을 해왔다. 그런데 모든 문제에 문화나 한류를 갖다 붙이면서 정작 문화의 자율성, 독립성에는 무감각한 게 지금 문화 관료들의 수준 아닌가”라며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