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농락한 최순실 게이트…문화로 세상 바꿀 수 있다는 꿈 뒤흔들어

대학원에 입학할 때다. 후배들은 왜 전공이 정치가 아닌 문화냐며 의아해했다. 정치에 제법 관심이 많았다. 인턴활동도 기업이 아니라 시민단체 의정감시팀에서 했다. 복수전공도 정치학을 택했다. 소속 학회는 근현대사연구회였다. 과제 핑계로 국회도 자주 드나들었다. 캠퍼스 바깥에서 열리는 시민강좌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선배들과 남북정상회담같은 이슈로 시국토론도 벌였다. 그럼에도 나는 석사 전공을 문화연구로 택했다.

 

언젠가부터 선거나 정당보다 사람들의 일상이 더 탐구할만한 대상이라 생각하게 됐다후배들에게 이렇게 답하곤 했다. 사실이 그랬다. 대학 4학년 때 미국 역사학자 린 헌트(Lynn Hunt)가 쓴 프랑스 혁명의 가족로망스라는 책을 읽었다. 헌트는 18세기 말 프랑스 시민들의 사소한 독서취미가 프랑스 혁명의 기폭제 중 하나였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문화가 정치를 바꿨다는 얘기다.

 

공부해보니 즐거웠다. 아니, 설레었다. 대학시절 주로 강의실 바깥을 맴돌았다. 졸업평점은 3.0을 겨우 넘겼다. 그런 불량학생이 대학원 때는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영국으로 유학 갈 작정이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흐르지 않았다. 여러 속사정이 겹쳐 어쩌다보니경제기자가 됐다. 문화에 대한 미련은 끝내 버리지 못했다. 입사 후 첫 인사발령을 산업팀으로 받았다. 팀 한 구석에 콘텐츠, 엔터테인먼트가 취재영역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핑계로 문화계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문화계 인사들의 집회나 기자회견이 열리면 괜히 가서 명함을 돌렸다. 지금은 문화산업 직격인터뷰같은 연재도 하게 됐다.

 

기자가 됐을 때도 후배들은 물었다. ‘왜 정치부가 아닌 경제부?’ 나는 문화산업을 취재하면 정치의 밑바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나는 지난 주 내내, 아니 오늘까지도 정치기사를 썼다. ‘줄줄이 터진 악재에 문화관련 기관들 패닉’’, ‘문화계 차은택·체육계 김종, 전횡 휘두른 두 완장’, ‘‘낙하산 요람콘텐츠진흥원장 잔혹사. 그들의 의혹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대통령과 비선실세로 수렴됐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최순실 블랙홀 탓에 언론지면에서 사라졌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그렇게 취약한 부처인지도 이제 알았다. 취재를 하다보면 ‘(문체부가) 예산을 지렛대 삼아 곳곳에 입김을 넣고 인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관련 사정을 잘 아는 문화계 인사들이 전해주는 말이다. ‘산하기관 정기간행물 외부필진 원고에도 간섭한다는 증언도 있다. 그런 문체부도 최순실, 차은택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나 보다.

 

나는 요즘 후회한다. 문화를 전공으로 택했을까. 정치나 경제를 전공했으면 세상을 좀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니, 차라리 심리학을 공부했으면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를 통찰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문체부 안팎의 고위직 인사들은 으레 백범 김구의 문화 강국론을 입에 올린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높은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라도 백범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련다

 

"선생님, 저들이 문화를 이용해 우리나라를 가장 추하고 불행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을 탐구하기 위해 문화를 공부했다. 현실의 세상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등에 업고 문화계 인사와 예산을 주물럭거린 비선실세가 좌우했다. 이제는 문화를 다시 공부해도 세상을 알 수 없게 됐다. 박근혜, 최순실, 김종, 차은택이 사람들이 나는 너무나 밉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