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판 수입 증가…철강업계 “설비 감축만이 해결책 아니다”
대표적 공급과잉 품목으로 지정된 ‘후판’을 두고 정부와 업계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정부는 최근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발표한 구조조정 보고서를 근거로 업계에 후판 생산량을 줄이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반면 철강업계는 설비 감축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맞서고 있다. 최근 중국산 후판 수입이 늘면서 철강 업계의 시름도 점차 깊어지고 있다.
후판은 두께 6㎜ 이상인 두꺼운 철판을 말한다. 선박과 건설용 철강재에 주로 쓰인다. 국내 철강 생산량의 17%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한때 후판은 국내 조선업계 수요 덕분에 호황을 누렸다. 최근 조선 경기가 악화된 데다 값싼 중국산 후판이 유입되면서 국내 후판 생산업계 수익성은 점차 악화되고 있다.
국내서 후판을 생산하는 업체는 포스코,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이다. 포스코가 4개, 현대제철이 2개, 동국제강이 1개 후판 공장을 운영 중이다. 국내 후판 생산량은 포스코 700만톤, 현대제철 350만톤, 동국제강 150만톤 등 총 1200만톤에 이른다. BCG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920만톤에 달했던 후판 수요는 2020년 700만톤으로 급감할 전망이다.
정부는 철강업체들에게 후판 생산 설비를 감축하라고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특히 초기 BCG 보고서에는 국내 후판 공장 7곳 중 3곳을 폐쇄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이 담겼다. 이와 관련 철강업계 반발이 커지자 최종 보고서에는 공장 폐쇄 내용을 삭제하기도 했다.
철강업계 생각은 다르다. 후판 공급과잉은 국내 철강업체 설비 폐쇄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후판은 일반 철근과 달리 주문자생산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조선업체들이 주문할 때만 후판을 생산하기 때문에 실제 생산설비와 공급량에 차이가 난다. 즉 주문 수요에 따라 얼마든지 공급량 조절이 가능하다.
여기에 동국제강은 이미 2012년과 지난해 2차례에 걸쳐 290만톤의 설비를 단계적으로 줄여 현재는 1개 공장, 150만톤만 유지하는 상태다. 전중선 포스코 경영전략실장은10월 26일 3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후판 구조조정 부문에 대해 “전기로 등 일부 설비를 제외하면 포스코나 현대제철 모두 공장을 거의 풀가동 중”이라며 “양사 모두 후판공장 등을 문 닫아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후판 수입 물량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 9월 후판 수입량(통관기준)은 23만3038톤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62% 증가했다. 후판 수입량은 7월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7·8월 후판 수입량은 각각 17만4700톤, 22만2548톤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4.2%, 45.3% 증가했다.
중국산 후판의 경우 7월 11만8288톤, 8월 15만6066톤, 9월 14만9536톤을 수입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14.9%, 59.1%, 44.5% 늘어난 수치다. 일본산 수입량도 증가했다. 8·9월 수입량은 각각 6만5161톤, 8만386톤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5%, 106% 증가했다.
이와 관련해 철강업계 관계자는 “최근 경기가 어려워지자, 국내 수요업체들이 원가절감 차원에서 국산보다 저렴한 중국산 후판을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중국산 후판은 국내산에 비해 톤당 10만원 가량 저렴한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산 수입 증가와 관련해선 “일본산은 오래전부터 많이 수입돼 왔다”며 “국내산 가격이 오르자 일부 업체들이 일본산을 더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울러 최근 철강사들은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사에 공급하는 3분기 후판 가격을 톤당 5만원 인상한 55만원 안팎 수준으로 합의했다. 철강사들은 철광석 등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후판 가격 인상은 불가피한 조치라고 밝혔다. 이에 업계에서는 값싼 중국산 후판 수입이 더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중국산 후판 수입량은 연 250만톤으로, 지난해 전체 후판 수요(920만톤)의 약 4분의 1가량을 중국산이 차지했다.
철강업계는 생산설비 감축보다는 무분별한 후판 수입 규제 등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품질 등을 무시하고 원가절감 차원에서 값싼 수입제품만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부가 제시한대로 후판 설비를 감축할 경우, 감축된 생산량 만큼 수입산이 국내 시장을 차지할 가능성도 높은 상황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후판 설비 감축만이 해결책은 아니다. 향후 경기가 회복되면 후판을 조달하기가 어려워진다”고 밝혔다. 그는 “후판 설비를 감축하면 상대적으로 중국이나 일본 업체들만 이득을 볼 것”이라며 “감축보다는 무분별한 후판 수입을 막기 위한 규제 등을 마련해, 국내 철강시장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