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제동장치 오작동이 후방 충돌 불러
안전 위험을 사전에 인식해 차량 스스로 사고를 방지하는 현대·기아차의 능동형 안전장비가 오히려 운전자를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운전자가 전방에 나타난 장애물을 미처 보지 못하더라도 충돌에 앞서 차량이 멈추는 긴급제동(AEB) 기능이 오작동해 뒤따라오는 차량과 충돌 가능성을 되레 키우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1월 미국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스마트카 경쟁에 출사표를 던지고 주행보조기술 장착에 나섰다. 2030년까지 완전 자율주행 기술을 완성한다는 목표에 따라 주행보조기술 보급을 늘린다는 계획이다.
기아차는 능동형 안전장비인 드라이빙 세이프티팩 장착을 고급 세단이 아닌 중형 세단 K5에까지 확대하는 한편 미니밴 카니발에도 추가했다. 현대차는 준준형급 친환경차인 아이오닉에도 능동형 안전장비를 더했다. 게다가 국토교통부가 지난 4월 자동차에 AEB 장착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현대·기아차는 완전 자율주행 전 단계인 주행보조 기술 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최근 현대·기아차의 이 같은 주행보조 장치가 사고를 유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AEB에서 오작동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 추돌사고 부추기는 긴급제동장치
지난 6월 기아차 중형 세단 K5를 구매한 석주환(22) 씨는 안전을 위해 추가 비용을 들여 구매한 드라이빙 세이프티팩이 오히려 주행 안전을 위협한다고 토로했다. 석 씨는 “시속 50㎞에 가까운 속도로 도로를 달리는 중 옆 차선을 지나는 차량을 잘못 인식해 작동한 AEB로 인해 후방 충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차량은 측면에 사람이 서 있어도 AEB 기능이 작동하며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게다가 AEB는 때에 따라 임의로 작동해 후방 충돌 상황 모면에 나설 수도 없다는 게 석 씨의 설명이다. 석 씨는 “AEB 기능이 차량 측면 1m에 사람이 서 있을 때 작동하거나 때론 작동하지 않을 때도 있어 늘 두려움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AEB가 작동하는 단계도 제각각이었다. 제품 설명서엔 추돌 위험이 감지될 경우 1차, 2차에 걸쳐 경고등이나 경고음으로 운전자에게 상황을 먼저 알리고 운전자가 제동하지 않거나 늦을 경우 3차 경고 이후 급브레이크가 작동한다고 나와 있지만, 경고음이 울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근처 기아차 정비 사업소를 찾아 레이다와 카메라 센서를 조정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비 사업소 서비스 팀장은 “옆 차를 인식해도 긴급제동이 걸릴 수 있다”면서 “긴급제동 기능이 어쨌든 작동하고 있으므로 장치는 정상이다”라고 설명했다.
◇ “K5 외 다른 차량도 같은 문제 발생”
현대모비스 답변은 달랐다. 석 씨의 고장신고를 접수한 현대모비스 담당자는 “쏘나타나 카니발 등 주행보조 장치 패키지를 추가 장착한 다른 차종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레이더나 카메라와 같은 부품의 문제가 아닌 전체 모듈 자체의 문제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모비스는 현대·기아차 주행보조 장치에 들어가는 대부분 기술을 개발하고 양산하는 부품업체다.
현대차 중형 세단 쏘나타에 주행보조 장치인 세이프티 패키지를 추가한 이모(32) 씨도 AEB가 갑작스럽게 작동해 후방 충돌 위험을 겪었다. 이 씨는 “당시 현대모비스로부터 종합정보장치인 디로그 장비까지 설치해 가며 문제 원인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이어 “현대모비스 측에서 디로그 장비를 통해 모은 정보를 본사로 가져가 분석했지만 돌아온 답은 결국 또다시 정상작동이었다”며 “언제 갑자기 급제동이 걸릴지 모르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했다.
한편 석주환 씨는 기아차 중형 세단 K5의 잇따른 AEB 오작동으로 드라이빙 세이프티팩 모듈 전체를 교체하고 더 정밀한 디로그 장비를 설치했다. 하지만 불안한 급정거는 개선되지 않았다. 석 씨가 문제 해결을 재차 요구하고 나서자 현대·기아차 측은 "데이터 분석결과 '난반사에 의한 정상작동'이었다"면서 “무서우면 주행보조 장치를 끄고 타라”고 말했다.
자동차 업계 전문가들은 난반사에 의한 AEB 작동을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전자 장치의 오류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지만 한순간의 실수가 생명을 위협하는 도로 위에선 그 자체로 결함이라는 것이다. 김정하 국민대 자동차융합대학장은 “난반사는 물체에 전파를 보내 인식하는 레이다와 상관없다”며 “긴급제동 기능이 레이더와 모노 카메라를 동시에 이용하는 이유가 전방 충돌 감지를 정확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주행보조 장치를 공급하는 현대모비스와 이를 납품받아 생산하는 현대·기아차 모두 이 문제와 관련해 이미 여러 차례 내부회의를 열었다”며 “미국 자동차 부품업체가 만든 장치를 현대·기아차 차량에 적용하고 있는 탓에 자체 원인 규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모비스 관계자는 “문제 차량에서 수집한 정보를 TRW라는 미국 부품업체에 보내 분석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에 업계 한 전문가는 “소비자는 안전을 위해 현대차 세이프티 패키지와 기아차 드라이빙 세이프티팩에 각각 170만원, 191만원을 추가 지불한다”면서 “현대·기아차는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현대차 관계자는 "일부 제품에서 나타나는 문제일 뿐 주행보조 장치를 달고 있는 모든 차종과 차량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일부 사례를 전체적인 문제로 확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