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고지 의무 없다"…피해자 더 양산할 수도
하지만 대법원의 배상 확정 판결이 나오고 시간이 꽤 지나도 배상금을 준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변호사 사무실에 수차례 전화를 걸어 배상금에 대해 물어봐도 소송 업무를 전담했던 사무장은 "아직 국가에서 돈이 나오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렇게 7개월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지난 8월6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변호사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유가족들은 처음 이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었다. 유가족 정아무개 씨는 "변호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미 직원도 다 떠나고 집기도 전부 치워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변호사 사무실 전화로만 연락한터라 사무장 등 직원들을 수소문할 방법도 없었다.
배상금의 행방은 이때까지도 오리무중이었다. 변호사가 사망하고 닷새 후인 8월11일 유가족들은 배상금 지급 기관인 서울고등검찰청에 대한 질의회신을 통해 지난 2월19일 배상금이 이미 지급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법무부 “고지의무 없다”...관련 규정만 내세우는 정부
변호사가 사망하고 서울고검에 질의 회신할 때까지도 유가족들은 배상금 수령에 대한 그 어떤 고지도 받지 못했다. 대법원까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유가족 112명 이름과 주소가 포함된 원고명단이 부속서류로 첨부됐기 때문에 우편은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관련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통보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국가의 고지의무 소홀을 지적한 <시사저널e>의 질의요청에 서면으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대리인에 의한 임의변제청구를 통해 배상액 등을 수령하는 경우, 국가는 승소한 청구인의 선택에 따라 ‘청구인 본인 또는 대리인’에게 계좌로 손해배상액을 지급해야야 할 뿐 더 나아가 국가가 승소한 청구인 본인에게 배상금 지급 사실을 고지하거나 수령 여부를 확인할 근거는 없다.”
법무부는 유가족들이 대리인(변호사)을 통해 배상금을 받겠다고 선택했기 때문에 그 지급사실을 일일이 고지할 의무는 없다고 밝혔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27조를 보면 국가를 상대로 승소한 후, 변호사는 청구인들의 신분증 사본과 위임장을 지급기관에 제출하면 배상금을 대신 받을 수 있다.
현행 규정은 정 씨 같은 국가배상 청구인들이 승소하고 나서 실제 배상금 수령까지 오직 변호사의 양심에만 의존해야하는 허점이 있다. 변호사가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셈이다. 법무부는 이런 법률상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2011년 ‘승소한 변호사는 모든 원고들에게 변제금을 지급했다는 사실을 6개월 내에 국가에 증명해야 한다’는 임의변제 업무처리 지침을 일선에 내린 바 있다. 증명방법은 각서 형태의 이행상황 보고서를 관할법원에 제출하면 되는데 이마저도 정 씨의 사건처럼 변호사가 배상금 지급 전에 사망했을 경우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민사소송에서도 변호사의 승소금 배달사고는 종종 일어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는 “협회에서는 승소금 지급지연 등에 대한 민원이 들어오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지급하도록 조정하고 해당 변호사에게는 품위유지의무 위반으로 과태료 또는 정직 처분의 징계를 내린다”고 밝혔다. 민사소송의 경우 협회가 조정역할을 하면서 사실상 청구인들의 해결사 역할을 하지만 국가배상소송에서 정 씨 같은 일을 당할 경우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다.
정 씨는 “국가배상금 18억원이 사라졌는데 본인들은 규정대로 했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하더라. 현 규정에선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말란 법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