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량, ‘플리 바겐’으로 고의조작 사실 첫 인정…국내 민·형사 소송 폴크스바겐에 불리해져
국내 폴크스바겐 집단소송이 새 국면을 맞게 됐다. 독일 자동차업체 폴크스바겐 엔지니어가 미국 법원에서 배출가스 조작 사실을 시인한 탓이다. 지금까지 폴크스바겐 임원 및 기술진은 각국 규제당국과 검찰조사에서 조작에 개입한 사실은 없다고 선을 그어왔다.
미국 법정에서 폴크스바겐 핵심 엔지니어가 조작을 인정함에 따라 폴크스바겐에 집단소송을 제기한 국내소비자들도 더 큰 피해보상액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검찰에 기소되거나 조사를 받고 있는 폴크스바겐 임원들 중 일부는 “우리도 잘못을 인정하고 형량을 경감받자”고 담당 변호사에게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AFP통신 따르면 미국에서 팔린 폴크스바겐 차량 50만여대에 설치된 배출가스 조작 장치를 개발한 혐의로 미국 디트로이트 연방법원에 기소된 제임스 량 폴크스바겐 엔지니어가 9일(현지시각) 혐의를 인정하고 검찰 수사에 협력하기로 했다.
량은 미국 수사당국이 ‘배출가스 조작 프로젝트’의 전말을 밝혀낼 핵심인물로 꼽아왔다. 량이 폴크스바겐 미국지사 뿐 아니라 독일본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특히 2008년 폴크스바겐 차량의 미국 환경청 승인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미국 검찰은 올해 6월 량을 기소한 뒤 비공개 재판을 진행해 왔다. 재판 과정에서 미국 검찰은 량에게 폴크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장치를 고의적으로 개발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형량을 줄여줄 수 있다고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협상을 통해 형량을 경감받거나 조정하는 제도인 플리 바겐(plea bargain)을 이용한 것이다.
결국 량이 플리 바겐에 응하면서 폴크스바겐이 배출가스를 어떤 방식으로, 누구 지시에 의해 조작했는지 밝혀질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검찰이 제시한 플리 바겐 조건 중에는 량이 독일 검찰수사에도 협조한다는 단서가 들어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폴크스바겐을 상대로 제기된 국내 형사·민사소송도 새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폴크스바겐 본사 엔지니어가 조작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이상, 그 동안 “수뇌부에서 소프트웨어 조작 지시는 없었다”며 발뺌하던 본사 및 한국지사 임원들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됐다.
검찰은 토마스 쿨 폭스바겐코리아 사장과 요하네스 타머 아우디폭스바겐코리아 총괄대표 등이 배출가스 재순환장치(EGR)를 교체하라는 독일 본사 지침에 따라 차량 불법 개조를 지휘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쿨 사장과 타머 대표 모두 “본사 차원 지시는 없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해 왔다.
법조계에 따르면 이들 수뇌부 외 검찰 수사명단에 오르내리고 있는 폴크스바겐 관계자들도 동요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대형로펌 변호사는 “일부 임원들이 담당 변호사에게 계속 (혐의를 부인하고) 버티다가 나중에 형량만 늘어나는 거 아니냐며 량의 경우처럼 검찰 조사에 성실히 응하는 것을 고려하자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폴크스바겐을 상대로 자동차 배출가스 조작에 따른 사기로 인한 매매계약 취소 및 매매대금반환청구를 제기한 국내 소비자들은 위자료 증액을 검토 중이다. 사기라는 죄목의 핵심 중 하나인 고의성을 본사 엔지니어가 인정한 이상, 국내 소비자들의 정신적·물리적 피해 규명도 한결 수월해졌다는 판단이다.
국내 폴크스바겐 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바른 하종선 변호사는 “량은 폴크스바겐 핵심 엔지니어다. 조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량이 플리바겐에 합의하면 폴크스바겐 본사가 빠져나갈 구석이 없을 것”이라며 “국내 검찰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형사유죄와 민사승소 및 위자료증액의 획기적 계기가 마련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