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 수리 등 영세업자 200여명 내달 계약해지…선주협회 “1154명까지 실직 번질 수 있어”
무너진 한진해운에 한숨 짓는 건 조양호 회장뿐이 아니다. 부산항에 근무하는 노동자 수백 명이 지난달 31일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 소식에 좌절했다. 이들은 한진해운 부두에 배가 뜨지 않게 되면 당장 직업을 잃을 처지에 놓였다.
5일 부산 강서구에 위치한 부산신항만은 한적했다. 검은 매연을 내뿜는 트럭 여러 대가 항만 입구에 줄지어 섰지만 사람 기척을 찾기가 어려웠다. 항만 입구에는 야드 트랙터(YT) 수십 대가 질서 없이 정차해 있었다. 야드 트랙터는 배가 싣고 온 컨테이너를 운반하는 역할을 하는데, 한진해운 법정관리 이후 시동 걸 일이 부쩍 줄었다.
5년 전부터 항만을 드나들었다는 트럭운전사 김치명씨는 “야드 트랙터 운전기사들은 언제 어느 규모의 배가 부두로 들어오는 지 외우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영 일이 없으니 저렇게 (야드 트랙터를) 세워둔 것”이라며 “야드 트랙터가 부두 업황을 보여준다고 보면 된다. 대기기간이 길어질수록 일이 없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부두 노동자들은 한진해운 사태가 장기화되면 이들 트랙터 운전사들이 가장 먼저 실직 위기에 놓일 것이라 전망한다. 한진해운 신항만에 따르면 야드 트랙터 기사는 ㈜한진과 외주업체가 50:50 비율로 채용한다. 한진에 속한 기사들은 상황이 낫지만 당장 외주를 통해 들어온 기사들이 문제다. 이들은 배가 들어오지 않으면 부두에서 일할 기회를 잃게 된다.
항만입구에서 한진해운 부두로 향했다. 부두 한가운데 짙은 분홍색 탠덤(Tandem) 방식(20피트 컨테이너 4대, 40피트 컨테이너 2대 동시 작업 방식) 안벽 크레인이 마치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바로 옆 노란색의 무인 자동화 야드크레인이 ‘지잉 지잉’ 소리를 내며 전후좌우로 연신 움직이는 것과는 대조됐다.
안벽 크레인은 자동화 크레인과 달리 숙련된 기사들에 의해 조종되는데, 이날은 정박한 용선이 없다보니 작동될 이유를 잃은 것이다. 반면 야드장치장에 위치한 야드크레인은 한진해운에 맡긴 물건을 빼가려는 화주들 성화에 쉴 틈 없이 작동돼야 했다. 한진해운 신항만 측에 따르면 11일까지 부두에 들어올 한진해운 선박은 없다.
안벽 크레인 옆에는 래싱(lashing)업체 사무실이 있었다. 래싱은 선박에 실린 컨테이너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한진해운이 기항하는 부산신항 한진터미널의 래싱업체는 3곳이다. 이들은 지난 1일 0시부터 대금 체불을 이유로 한진해운 선박에 대한 작업을 거부했다가 부산항만공사의 지급 약속을 받고 1일 오후 작업에 복귀했다.
래싱업체 목소리에 정부와 항만공사가 신속하게 반응한 이유는, 이들이 작업을 거부하면 당장 컨테이너 운반작업 자체가 정지되기 때문이다. 이 탓에 업계에서는 래싱업체 작업자들이 한진해운 법정관리 여파에도 임금을 체불받거나 즉시 해고될 일은 적다고 말한다. 문제는 컨테이너를 수리·정비하는 노동자, 컨테이너 세척·부두 청소노동자다. 이들 영세업자들은 노동조합이 없고 작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탓에 ‘해고 쓰나미’ 일선에 놓여 있다.
5일 부두 인근에서 만난 컨테이너 세척업 종사자 최희삼(가명·62)씨는 “한 달 꼬박 일해봐야 버는 돈이 120만원 안팎이다. 이걸로 손주 밥도 먹이고 안사람 약값도 버는 것”이라며 “당장 회사에서 일거리가 없으니 나오지 말라고 한다면 맞설 힘도 없다. (핵심작업에 투입되는 노동자와 달리) 우리 같은 사람들은 눈도 입도 없다. 상황 나아지길 배 굶어가며 기다려야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진해운 신항만에 따르면 부두에서 일하는 최씨 같은 영세업자는 200여명이다. 이들 중 대다수가 협력업체를 통해 고용된 일용직이거나 3개월 계약직이다. 한진해운 ‘부두 침묵’이 계속될 경우, 항만 측은 이들과의 계약관계를 오는 10월 종료시킬 예정이다.
4일 부산항 신항 한진해운 신항만을 방문한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은 “항만연관산업 지원을 위해 한진해운 미수채권이 공익채권으로 분류되도록 법원에 협조를 요청하고 고충상담창구 운영, 피해조사 및 법률자문 등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해수부는 중소기업청 및 고용노동부와 협의해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저금리 경영안정자금을 지원하고 실직시 실업급여를 신속히 지급하는 방안 등을 모색하고 있다.
항만에서 일하는 영세업자 중 다수가 정규직이 아닌 탓에 퇴직금이나 실업급여 등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또 이들 중 다수가 고령 노동자고 자신이 지원대상자인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부와 한진해운, 부산시가 내놓은 실업 지원대책 삼각지대에 위치해 이번 법정관리 여파를 홀로 견뎌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한진해운 신항만 관계자는 “정부와 기업에서 회생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상황이 쉽지 않다. 당장 배가 뜨지 않는 상황에서 영세 노동자들까지 챙기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그들이 있어 항만이 유지되는 것은 맞다. 보이지 않지만 가장 필요한 분들인데 실직 위기에 놓인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밝혔다.
한편 한국선주협회는 환적화물이 줄어들면 부산항만에서만 1000명이 넘는 실직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협회 분석자료에 따르면 한진해운 청산 시 해운업계에서만 1193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부산항만에서 근무하는 선박관리 및 수리, 터미널, 환적화물 관련 종사자 1154명이 실직위기에 처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영무 한국선주협회 상근부회장은 “한진해운이 청산된다면 불특정 다수 화물의 물류중단과 중첩적인 소송으로 서비스 공급 재개가 불가능해진다”며 “한진해운 매출이 소멸되고, 환적화물 감소와 운임폭등을 감안한다면 연간 17조원대의 손실이 발생한다. 일자리 감소도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