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어려움 덜고 정부의 책임 규명…"이런 불행한 사건 다시 없도록"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회원들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옥시 한국 본사 앞에서 '옥시 최종배상안 발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사진=뉴스1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손상으로 영유아, 아동, 임산부, 노인 등 700명이 넘는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1997년 최초로 가습기살균제가 출시된 이후 폐손상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사망 사건은 2011 4월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1 4월 급성 호흡부전 임산부 환자가 잇따라 입원했다. 5월 입원환자 중 34세 여성이 사망했고, 6월엔 여성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손상으로 숨졌다. 소리 없는 사망 사건으로 국민들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00명이 넘는 영유아와 산모가 집단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2011 831일 질병관리본부는 원인 미상의 폐손상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추정된다는 내용의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달 26일 환경부 산하 환경보건시민센터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이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전체 규모는 사망자 780, 심각한 폐질환을 겪고 있는 피해자는 3270명 등 총 4050명으로 잠정집계됐다. 그러나 기존 질환 악화나 경미한 호흡기 질환 등 자각하지 못한 잠재적 피해는 추산불능이다.

 

폐손상조사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 수를 약 800만명으로 추산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모임은 잠재적 피해자를 200만명 이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옥시가 2001년부터 제조∙판매하기 시작해 2011년 판매를 중지하기까지 연평균 60만개씩 판매된 가습기살균제 사망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다. 국민적 공분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재난은 특정 제조사, 특정 제품의 결합이나 불량품에 의한 소비자 피해가 아니다. 15개 이상의 제품에서 사용한 독성 화학물질에 의해 발생했다. 화학물질 관리를 부실하게 진행하고, 피해 발생 확인 후에도 정부의 부실한 대책이 피해자들의 고통을 키웠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게 됐다. 제조사뿐만 아니라 국가의 화학물질 관리 실패와 부실대응으로 발생한 대규모 참사로 규정짓고 있다.

 

그 동안 정부와 새누리당은 가습기살균제 문제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2008년 대학병원 의사들이 원인 미상 폐질환과 가습기살균제의 연관성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을 때도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보건복지부와 환경부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대규모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란 지적이다.

 

유해물질 관리에 실패한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며 피해자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줬다.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성분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는 정부 승인을 받고 버젓이 유통됐다.

 

유해성분을 제대로 규제하지 않아 정부가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 여론이 커지자 지난 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은 가습기살균제 피해보상 특별법을 들고 나왔다. 그 동안 소비자와 가해 기업의 문제일 뿐 정부 책임은 없다며 가습기살균제 피해 규제법을 반대했던 새누리 의원들이 돌연 태도를 바꾼 것이다.

 

이에 앞서 관련 법안은 2011년 보건복지부의 폐손상과 관련된 역학 조사 이후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바 있다. 2013 4월 장하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가습기살균제 피해 규제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와 새누리 반대로 처리가 무산됐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유족 및 시민단체 등의 대책마련 요구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소관부처가 불분명하고, 법적 근거가 없으며, 기업과 소비자간의 문제 등을 이유로 미온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20대 국회 개원 이후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6 2일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독성이 판명된 화학물질을 함유한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건강상 피해를 입은 피해자 및 유족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원인을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이정미 의원은 가습기살균제 피해 책임당사자이면서 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는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구제하고 피해원인을 조사할 수 있도록 법률안이 처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언주 더민주 의원은 지난달 7일 가습기살균제 피해배상 및 구제에 관한 특별법안과 생활화학용품 피해배상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을 대표 발의했다. 원인 미상의 중증 폐질환 원인이 가습기살균제라고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피해자들은 가해기업과 정부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왔다고 이 의원은 주장했다.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적 재난이 됐다는 것이다.

 

화학물질 관리를 부실하게 진행한 정부와 피해 발생 후 안이한 대처 등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법적근거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또 유해화학물질이 함유된 생활화학용품 사용으로 발생할 예상치 못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방안도 담겼다.

 

이언주 의원은 가습기살균제 문제 해결을 위해선 성역 없는 조사로 철저히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을 위한 피해구제 법안의 조속한 통과다. 아쉽게도 국정조사특위에 입법권은 부여되지 않았지만 그 동안 방치돼온 피해자들과 민생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20대 국회가 들어선 만큼 피해자의 아픔을 공감하며 국민들이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이들 법안 처리에 매진하겠다고 언급했다.

 

홍영표 더민주 의원과 서영교 무소속 의원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들이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소송이 장기화되며 고통이 날로 가중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구제급여를 지급해 피해자의 경제적, 건강상 어려움을 경감시키는 데 주안점을 뒀다. 피해실태를 조사하고 피해자 인정 여부를 심사하기 위해 가습기살균제 피해조사∙인정위원회를 두는 내용도 담겼다.

 

지난 5일 강찬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대표는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그는 “780여명의 국민들이 목숨을 잃는 동안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감사원이 나서서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고 힐난했다.

 

강 대표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정부 책임을 따져 묻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생활 속 유해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정부의 실패와 유독성 물질에 대한 관리체계 전반에 대한 감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10일 참여연대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막기 위해 법적 상한이 없는 징벌적 손해배상법 입법청원 기자회견을 열었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무책임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취지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법적 상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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