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상근부원장이 2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컨퍼런스센터에서 진행된 '경제활성화를 위한 배임죄 개선방안' 세미나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 사진=한경연
재계가 지속적으로 문제 삼아온 배임죄 개정 필요성을 또다시 제기하고 나섰다. 하지만 야당을 비롯한 국회는 물론 법무부·검찰 내에서도 개정에 부정적이어서 입법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2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컨퍼런스센터에서 학계 전문가 등이 참여한 '경제활성화를 위한 배임죄 개선방안' 세미나를 통해 배임죄 개정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반대 측 패널은 없었다.
배임은 기업 경영인 등 타인을 대신해 일을 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위배하는 행위를 통해 회사 등에 손해를 끼치고 본인이나 제3자가 그 이득을 취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 중 다수가 각각 계열사를 통한 편법 증여, 부실 계열사 지원 등으로 인해 배임죄로 기소된 바 있다.
권태신 한경연 원장(전 국무조정실장)은 이날 인사말에서 배임죄에 대해 "규정의 모호함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오명을 쓰고, 오랜 기간 역동적인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어 "불확실한 경제상황 속에서 내려진 경영자 사업 결정이 사후적으로 잘못되더라도 배임죄라는 형법적 잣대가 아닌, 위험을 감수한 경영적 판단으로 존중해 주는 제도적 환경 조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참석자들은 배임죄가 경영자의 경영상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며 경영판단 원칙에 따른 면책조항을 상법에 추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동권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인에 대한 과잉 처벌 및 경영 활동의 위축을 초래한다"며 "정상적인 경영판단 행위까지 엄격 처벌될 우려가 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계 "우량 계열사 이용한 부실 계열사 구제, 외국선 배임 아냐"
신석훈 한경연 기업정책실장도 "대법원이 2004년 기업인 배임죄를 판단할 때 경영판단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했지만 그동안의 대법원 판결들을 보면 경영판단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재벌 총수가 부실 계열사 지원에 우량 계열사를 동원하는 행위를 국내와 달리 미국과 유럽에선 배임죄로 처벌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송헌재 서울시립대 교수는 "(배임죄가) 기업가 모험심과 도전정신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며 "이런 상황에서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처럼 혁신 기업가 탄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또 검찰이 기업 경영자의 배임 의혹에 대해 상법이 아닌 형법을 의율 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손 교수는 "상법상 특별배임행위에 해당되는데도 형법의 업무상 배임죄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을 적용해 가중처벌을 하고 있다"며 "상법상 특별배임행위 적용 여부를 명확히 하는 입법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 실장도 "지금까지 (검찰이) 특경가법을 적용하기 위해 형법상 배임죄를 적용했다"며 "이는 특별법 우선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회사 이사 등에 대한 배임행위에 대해선 상법상 특별배임죄를 적용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이 경우 상법상 경영판단 원칙이 동시에 적용돼 배임죄 확대 적용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초 재계는 형법상 배임죄와 특경가법상 배임 조항에 대해 지난해 2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나길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 정반대로 헌재는 9인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당시 대법원이 손해의 개념과 범위를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고 경영상 판단 법리를 수용해 고의 판단에 엄격한 해석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결론 냈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배임죄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는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은 이날 축사에서 20대 국회에서 배임죄 개정안을 다시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정 의원이 전경련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8월 대표발의한 개정안은 '손해의 고의성과 현실성'이 입증돼야 배임으로 인정하도록 규정한 바 있다. 이 경우 배임죄 적용대상은 매우 협소해진다.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현 국무총리·사진 왼쪽)이 2014년 10월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법무부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 국정감사에서 김현웅 당시 차관(현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뉴스1
하지만 정부와 여야 모두 배임죄 개정에 부정적이다. 재계의 개정 요구가 사실상 받아들여지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한 부장검사는 "재계의 속내는 재벌 총수의 불법적 행태에도 '경영판단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줘야한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법무부장관 시절이던 2014년 10월 법제사법위원회 종합 국정감사에서 '배임죄가 외국에 비해 포괄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며 "현행법 운영상으로도 명백한 배임행위에 이르지 않는 합리적인 경영 판단에 대해서는 경영 판단 원칙에 따라서 처벌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후임인 김현웅 법무부장관도 국정감사를 비롯한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배임죄는 회사 경영자의 부정을 방지하고 소액주주를 보호한다는 측면이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법무부·검찰은 법원의 배임죄 해석에서 경영 판단 영역을 지나치게 넓게 인정한다고 보고 있다. 즉 법원의 배임죄 적용을 너무 좁게 해 기업 수사에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난 1월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건 1심에서 배임에 대해 무죄가 나자 검찰 2인자인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 판결을 거세게 비난하기도 했다.
이 같은 법무부와 검찰의 확고한 입장 탓에 정갑윤 의원의 개정안은 소속 정당인 새누리당 안에서도 호응을 끌지 못하고 있다. 소관 상임위인 법사위의 새누리당 의원 대다수는 검찰 출신이다. 실제 19대 국회에서 정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자동 폐기됐다.
야당에선 되레 특경가법 배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오제세 더불어민주당 의원 안은 현행 횡령·배임 액수가 50억원 이상일 경우 '5년 이상'으로 돼 있는 법정 형량을 '7년 이상'으로 상향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재벌 총수일가의 기업범죄에 대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오 의원의 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