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이야기
비장애아동 부모들의 이유없는 항의와 분노에서 보듯, 키즈카페에서 느낀 장애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의식적인 혐오보다 무의식적인 혐오에 더 가까웠다. 무의식적인 혐오는 의식적인 혐오보다 더 무섭다. 무의식적 혐오는 더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약자 중에서도 약자인 장애인은 무의식적이고 일상적인 혐오에 시달리고 있다.
일상적인 혐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키즈카페서, 학교에서, 텔레비젼에서 툭 튀어나온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실시한 장애영유아 교육권 보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아동 23.5%가 인권침해나 장애차별을 겪었다고 응답했다. 짝을 바꿀 때 교사가 공개적으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진 학생을 장애학생 옆자리에 앉힌 경우까지 있었다. 장애학생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를 줬고 함께 생활하는 학생들에게는 장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줬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마저 이런 일을 저지른다.
어릴 때부터 노출된 혐오적 시선은 장애인들이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사회에 섞이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말 이른 아침이면 어김없이 걸음마가 느린, 네살 발달장애 아동이 키즈카페에 왔다. 아직 다른 손님들로 붐비기 전이다. 키즈카페에서 매주말마다 첫손님으로 아이를 맞이하면서, 나는 아마 장애 아동을 향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일 거라고 짐작했다.
‘해치지 않아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키즈카페에서 장애아동들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들에게 ‘해치지 않는다’고 미리 설명이라도 해야할까. 하지만 해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다. 말 자체에 내재된 모순 탓에 ‘해치지 않아요’는 우스꽝스럽다. 장애인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혐오가 이와 같다. 어려서부터 차별의 눈총을 받고 자란 장애 아동은 주체적인 삶을 살기도 힘들어진다. 장애인 전문 인터넷신문 <비마이너>가 주장하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는 사회모순”처럼 그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달라지는 게 우선이 돼야 한다. 비장애인으로서 겪어보지 못한 장애인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