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웅의 콜라주 소사이어티

 

나는 보수적인 인간이다. 인류 사회는 급진적 혁명보다 점진적 개혁을 통해 발전했다. 급진적인 행위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급진성을 비판했다. 나는 버크의 지적에 공감한다. 또 버니 샌더스의 급진적 포퓰리즘 정책보다 버락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의 점진적이고 온건한 정책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바람직하다.


민주주의는 가장 불안하면서도 가장 나은 정치체제다. 시민은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기초한 선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해 자기 의사를 표출하고 대표자를 선출한다. 민주주의가 확립한 제도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정말 훌륭한 경제 체제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욕구를 긍정하여 인류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왔다.


얼핏 별개인 듯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밀접하다. 대런 아제몰루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경제학과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경제학과 교수는 2000년 영국 옥스포드대 '분기별 경제 저널(QJE)'에 게재한 논문 "왜 서구사회는 투표권을 확장했나?(Why Did the West Extend the Franchise?)" 및 그 후속 연구에서 엄밀한 수학적 모형과 실제 역사적 사례 및 데이터를 이용한 실증분석을 통해 "​​가난한 자가 소득이나 자산 불평등 탓에 갖는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투표권을 확대하면서 민주주의는 확립됐다. 이는 다시 가난한 자가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자본주의를 활성화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인류가 이룬 성취를 무산시키는 두 세력이 있다. 반지성적 포퓰리즘과 계층적 사회구조를 고집하는 기득권이 그것이다. 전자의 대표 사례가 버니 샌더스 열풍이나 브렉시트다. 후자의 대표는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 같은 사람이다. 전자는 시민이 편향되게 판단하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 후자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인 "모든 사람의 법 앞에서 평등"을 부정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사회적, 경제적 신분제도를 부정한다. 1987년 개정된 현행 9차 개정헌법은 제11조 1항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2항에는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나향욱 정책기획관은 인류의 진전을 이룬 제도이자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부정했다. 무엇보다 시민을 위해 복무하는 공무원으로서 지키고 받들어야할 헌법적 가치를 부정했다. 

이런 사람이 교육부 고위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이런 언행을 거리낌 없이 자행한다는데 현재 한국이 처한 불행이 있다. 포퓰리스트 정치인, 시민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언론, 여기에 시민을 업신여기고 시민 위에 군림한다는 인식을 갖는 "공공의 하인(公僕)"이 존재한다는 것은 한국이 총체적으로 잘못됐다는 증거다. 

서양에서 계몽주의 사상이 확립된 이래 일반적으로 주권자로 인식되는 시민 다수의 뜻에 반하는 통치자는 설령 그가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폐위되기가 예사요, 심하면 죽임까지 당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의 목을 벤 것은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하인"에 대한 시민의 징벌이었다. 한국 시민은 이런 망언을 내뱉은 무례하고 무지하고 무익한 하인을 어떻게 징벌할 것인가. 이처럼 무례하고 무지하고 무익한 하인은  연금도 받을 수 없게 파면 조처해야 한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