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가입자간 리스크 분산…불안정성 방지∙제도 운영 용이
퇴직연금에도 하이브리드 바람이 불고 있다.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장점을 결합한 캐시밸런스(CB)형 퇴직연금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저금리∙저성장 기조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운용수익률을 높여 노후 소득 보장 기능을 강화하자는 논리다.
한국 등 고령화∙저출산 국가들은 기초연금,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의 노후 소득보장 기능이 저하되고 있다. 이에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사적연금도 새로운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한 지 오래된 국가들의 경우 적립금 규모의 양적 성장으로 인해 상당한 소득대체 효과를 거두고 있다. 컨설팅 회사 타워 왓슨에 따르면 지난해 네덜란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금자산 비율은 183.6%, 미국 121.2%, 호주 119.6%, 영국 111.9% 등으로 연금자산 적립금이 GDP 규모를 초과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우리나라의 GDP 대비 연금자산 비율은 39.1%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저금리 기조와 저성장에 따른 수익률 감소로 연금재정 문제가 당면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운용수익률 하락은 기업들이 퇴직 소득을 보장하는 DB형 퇴직연금에서 DC형 퇴직연금으로 이동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DB형 퇴직연금은 적립금 운용과 퇴직연금 수급에 대한 모든 책임을 기업이 지고 있다. 적립금 운용수익률이 임금상승률보다 낮은 경우 기업 부담이 커진다. 반면 DC형 퇴직연금은 근로자 개별 계좌에 기여금을 납입하는 형태다. 자산 배분 및 위험관리 등을 근로자 개인이 자기 책임하에 운용해야 하므로 개인별 투자성과에 따라 퇴직급여가 좌우된다는 부담이 있다.
DB형과 DC형 모두 위험자산에 대한 적절한 운용을 통해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나 DC형은 자산운용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근로자 개인의 운용지시로 기대한 만큼 퇴직자산을 형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금융감독원에서 지난해 6월말 발표한 퇴직연금 영업실적에 따르면 전체 적립금 운용규모의 91.4%(DB형 97.6%, DC형 78.6%)가 원리금 보장상품으로 운영되고 있다. 저금리 기조 하에서 DB형은 기업이 추가부담금을 납입하고, DC형은 개인의 퇴직자산 형성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DC형은 운용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실적배당 상품에 대한 비중을 늘리는 경우 그만큼 개인이 부담하는 리스크도 커진다.
이에 따라 자산운용 리스크가 기업이나 근로자 어느 한 쪽에 편중된 DB형과 DC형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해외 각국에서는 이들의 특징을 결합해 리스크를 양자간에 분담하는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의 하나인 CB형 퇴직연금 제도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네덜란드의 집단형 DC 영향을 받은 영국의 리스크공유형 DA, 일본의 리스크분담형 DB 등이 있다.
CB형 퇴직연금은 부담금 납부 방식은 DC형과 같지만 자산운용을 기업이 일괄적으로 하며 일정 수준의 이율을 보장하는 DB형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개인별로 설정한 가상계좌에서 매년 급여에 따른 부담금과 일정한 이자를 적립한다. 실제 자산은 기업이 운용하고, 가상계좌에 적립된 부분을 퇴직시 확정적으로 지급한다. 자산운용 성과 잉여금 또는 부족분은 기업이 부담하는 형태다. CB형 퇴직연금은 보장이자 설계 기준에 따라 지표연동형 및 실적연동형 등 다양한 운영이 가능하다.
미국에서는 노동시장의 활발한 이∙전직, DB형 제도에 부담을 가진 기업 증가 등에 따라 CB형 퇴직연금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일본은 DB형 퇴직연금 운용손실로 인한 회계적 부담 경감을 위해 대기업 중심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는 금융시장 활성화 방안으로 DB형 연금 운용 리스크를 기업과 근로자가 분담하는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네덜란드의 집단형 DC 퇴직연금은 법적으로는 DB, 회계상으론 DC로 인식되는 혼합형 제도다. 가입자의 개인 계정은 없고 전체 집단을 하나로 운영한다는 점에서 DB형과 같지만 퇴직급여 수준이 적립금 운용 성과에 따라 변동할 수 있다는 점은 DC형과 유사하다. 적립금 운용 리스크는 근로자가 부담한다. 그러나 집단운영으로 리스크가 분산되고, 운용비용의 절감 및 젊은 현역 가입자의 자산과 수급 단계의 자산이 함께 운용될 수 있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 기대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정인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기업과 근로자 한 쪽으로 리스크가 편중된 기존 DB형과 DC형 퇴직연금의 중간적 형태인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은 집단화 장점을 살리는 방식과 기업과 근로자간 리스크를 분담하는 방식”이라며 “집단화를 통한 운영은 개인이 자산운용을 하는 리스크를 부담하지 않고 전문적 자산관리를 받을 수 있어 규모의 경제로 인한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