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행보 용선료 협상 현대상선과 비교...“경영진 진실된 회생 의지 보여야”
극심한 유동성 위기에 놓인 한진해운이 좌초 위기에 몰렸다. 같은 처지였던 현대상선은 해외선주들과의 용선료 협상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어 한숨 돌린 반면 한진해운은 용선료 협상과 사채권자 집회를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재계에서 우려하는 것은 공석이 된 한진해운 수장자리다. 현대상선은 현정은 회장이 고통분담 차원에서 대주주 감자와 사재 출연을 단행한 반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경영권 포기 각서를 제출했다며 채권단의 추가 지원 압박에 침묵으로 대응하고 있다.
여기에 최은영 전 회장은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한진해운 주식을 처분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검찰에 소환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한진해운이 채권단에 자구안을 제출했지만 오너 일가의 회생 의지가 극히 미미하다는 평가가 나오며 한진해운의 회생작업이 난항을 겪게 됐다.
◇ 침묵하는 조양호, 고개 숙인 최은영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8일 기업구조조정 추진계획과 국책은행 자본 확충 방안에 대한 백브리핑에서 "현대상선의 용선료 조정은 이번 주까지 협상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계약변경이 완전 마무리되는 시점은 6월 말이지만 이번 주 중에 용선료 협상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며 "채권단이 빠른 시일 내 회원사 동의를 확보해서 얼라이언스(해운동맹) 가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현대상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용선료 협상 타결이 사실상 마무리되면서 업계 이목은 이제 한진해운에 쏠리고 있다. 당초 얼라이언스 가입을 조기에 마무리 지은 한진해운 상황이 현대상선보다 낫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무엇보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오너가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현대상선은 지난 3일 열린 임시이사회에서 대주주 지분에 대한 7대 1 무상 감자를 결정했다. 현대엘리베이터(17.51%, 606만6273주), 현대글로벌(1.77%, 61만3563주), 현정은 회장(1.65%, 57만1428주) 등 총 20.93%(725만1264주)의 보유 지분이 감자 대상이다.
감자 후 대주주 지분율은 현대엘리베이터(3.05%), 현대글로벌(0.31%), 현정은 회장(0.29%) 등 총 3.64%로 줄어든다. 현 회장은 300억원의 사재 출연에 이어 무상감자까지 단행하며 막대한 손실을 떠안게 됐다. 대주주로서 일반 개인주주들에게 기업 회생 의지를 몸소 알렸다는 평가다.
반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사재출연 압박에 침묵으로 대응하고 있다. 자율협약을 신청하며 경영권을 포기한 상태에서 그 이상 책임은 감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조 회장은 한진해운 회생을 위해 월급까지 반납해가며 일선에서 일했다”며 “경영권까지 반납한 조 회장에게 사재출연까지 압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
2007년 한진해운 회장 부임 당시 “대한축구협회가 과거 히딩크 감독에게 모든 걸 일임했듯이 나도 전문경영인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며 한진해운을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하겠다고 천명했던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은 8일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최 전 회장은 한진해운이 자율협약을 신청한다는 것을 알고, 한진해운 주식 76만 주를 판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5억원 가량의 손실을 회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해외선주·사채권자 설득 가능할까
오너 리더십이 흔들리는 사이 한진해운은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현대상선은 사채권자들로부터 공모사채 8042억원에 대한 채무재조정 동의를 이끌어낸 뒤 용선료 협상 타결 수순에 들어간 반면 한진해운은 이 두 난관을 앞으로 해쳐나가야 한다.
문제는 한진해운이 해외선주들로부터 빌린 선박수와 용선료 규모가 현대상선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한진해운 대여선박은 91척으로 현대상선(83척) 보다 많다. 올해 4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지불해야 할 용선료 비용만 3조9000억원에 이르고, 그 이후에도 장기 용선계약에 따라 1조4000억원을 용선료로 지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연체된 용선료도 한진해운 발목을 잡고 있다. 현재 한진해운의 용선료 연체액은 총 1000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4일에는 나비오스가 용선료 체납을 이유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한진해운 소속 벌크선을 억류하기도 했다.
한진해운은 이 같은 상황에도 용선료 협상과 채무 재조정을 낙관하고 있다. 한진해운은 2일 여의도 본사에서 사채권자 집회를 위한 사전 설명회를 열고 "현대상선의 협상이 잘됐는데 저희는 더 나은 상황이니까 잘 될 것으로 본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진해운은 지난 4월 채권단에 조건부 자율협약을 신청하며 경영정상화 방안을 담은 자구계획안을 제출한 바 있다. 자구안에서 한진해운은 자산매각 등으로 4112억원 규모의 유동성 확보안을 담았다. 채권단은 한진해운이 용선료 인하와 사채권자 채무 재조정에 성공하면 조건부 지원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17일 한진해운 사채권자 집회에 참여할 예정인 한 투자자는 “(현대상선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석태수 사장이나 조양호 회장이 말을 너무 아끼는 게 아닌가 싶다”며 “지금으로서는 채무 재조정 찬반은 의미가 없다. 회사가 얼마나 진실된 모습으로 회생에 임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