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임시정부의 자금조달 본부··· ‘백산상회’ 설립 발기인
“민족의 자유 위해 무지를 추방해야”···진주고·진주여고, 탄생시킨 선각자 평가
해방 후 ‘500인 국민대회 준비위원회’ 참여···새 나라 건설 일조

2019년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일본제국주의 억압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지 100년이 흘렀지만 아직 그 정신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생생히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운동사(史)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 중에는 기업인 출신들도 많았다. 민족자본가로 통하는 이들은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거나 물질적 재원을 지원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이 직접 창립하거나 기틀을 마련한 기업들은 지금도 대한민국 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사저널e는 창간 4주년을 맞아 100년 전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 족적을 남긴 기업인들의 면면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허만정 선생은 1897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지신정' 허준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재계에서는 LG그룹과의 아름다운 동반자 관계로 유명하지만, 해방전 그의 생애는 독립에 대한 헌신으로 가득차 있다 / 사진=㈜GS
허만정 선생은 1897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지신정' 허준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재계에서는 LG그룹과의 아름다운 동반자 관계로 유명하지만, 해방전 그의 생애는 독립에 대한 헌신으로 기록돼 있다. / 사진=㈜GS

독립운동에 공헌한 기업들 가운데 재계순위 상위 기업집단을 꼽는다면 GS그룹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GS그룹의 창업주인 효주 허만정 선생은 LG그룹의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선생과 공동창업에 나서기 전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허만정 선생은 1897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지신정' 허준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국이 위태로운 시절에 태어난 그의 인생은 평탄할리 없었다. 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1919년 3·1 운동이다. 그는 당시 22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3·1 만세 운동을 경험한다. 이 경험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된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온 허만정 선생은 부친을 찾아간다.

이번에 상경했을 때 서울에서 3·1 독립선언이 있었습니다. 곧이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져 수많은 동포들이 다치거나 학살되었고 더러는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이 민족의 자유를 향유하기에 있는 힘을 다해야 하겠는데 먼저 이 나라에서 무지를 추방해야겠습니다. 제가 비록 미거하오나 학교설립에 힘써 보려고 하는데 아버님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허만정 선생의 신념에 부친인 허준 선생은 허만정 선생 소유의 토지인 함안 땅 약 700석지기(한 섬의 씨앗을 심을 만한 넓이의 논밭)를 제공한다. 이 토지를 바탕으로 허만정 선생은 1920년 진주일신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는 학교 설립을 방해했고, 당시 도청 소재지 이전 분규로 결국 남자 고등보통학교의 설립은 실패한다.

허만정 선생은 좌절하지 않고 방향을 바꿔 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추진했고 1925년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는 데 성공한다.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는 진주여고의 전신이다. 다만 허만정 선생은 학교 설립이 완성 단계에 다다르자 마무리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학교를 소유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을 위한 그의 노력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었다. 허만정 선생은 학교 설립 이전인 1914년 백산상회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자본금 13만원으로 설립된 이 상회에는 영남지방 대지주 총 32명이 주주로 참여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상회의 이름에도 명시된 백산 안희제 선생을 비록해 이유석, 추한식, 최준 등이 있다.

백산상회는 곡물과 면직물,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상회였다. 그러나 상회의 영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감추기 위한 명분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독립운동 자금 전달에 집중했다. 실제로 백산상회에서는 가게의 이익금뿐만 아니라 원금까지도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전달했다. 덕분에 경영상태는 언제나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백산상회에서는 대구와 서울, 원산 등은 물론 만주의 안동(現 단동), 봉천(現 심양) 등지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면서 자금 조달에 열중했다. 자금 전달은 남형우와 윤현진 등이 맡았다. 이 가운데 윤현진은 상해임시정부의 재정차장을 맡은 인물이다. 이 때문에 백산상회는 독립군의 은행이라는 평가와 함께 상해임시정부가 필요로 하는 경비 대부분을 조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업보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열중하는 동안, 조선총독부 역시 백산상회가 상해임시정부의 자금 공급처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에 1927년 조선총독부는 압수 조치를 실시했고 백산상회는 문을 닫게 된다.

경남 진주여고 앞에 세워져 있는 일신비 / 사진=㈜GS
경남 진주여고 앞에 세워져 있는 일신비 / 사진=㈜GS

허만정 선생은 해방 이후에도 새 나라를 만드는 일에 일조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자 허만정 선생은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한 국민 대회를 준비하는데 참여한다. 약 20여일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45년 9월 7일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정 수습 방법, 정당 설립, 국가의 정당 및 정책 등에 대한 범국민적인 토론이 진행됐다. 허만정 선생은 500인 국민대회 준비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새 나라를 만드는 일에는 국가 경제 성장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허만정 선생은 ‘연암’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에게 사업자금 투자와 경영 참여를 제의하면서 현재 한국 경제의 큰 축을 맡고 있는 LG그룹과 GS그룹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두 가문이 대대로 사돈을 맺었던 전통은 이후 재계에서는 널리 알려지 반세기 넘는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두 가문의 동반자 관계는 지난 2004년 GS그룹이 LG그룹에서 계열분리되면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분리 과정을 잡음 하나 없었다는 점은 지금도 재계에서는 ‘아름다운 동반자 관계’로 회자되고 있다.

허만정 선생은 조국의 광복을 지켜본 뒤 1952년 숨을 거둔다. 그의 묘비에는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고 집안을 잘 이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부자(父子)를 이야기할 때마다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적혀 있다.

진주여고 내에 위치한 효주 기념관 전경 / 사진=㈜GS
진주여고 내에 위치한 효주 기념관 전경 / 사진=㈜GS

창업주인 ‘효주’ 허만정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한 헌신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GS그룹에 뿌리깊게 남아 있다. GS칼텍스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독립서체를 배포하고 있다.

GS리테일은 전국의 1만 3500여 소매점 오프라인 플랫폼을 통해 국가보훈처의 역사 알리기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핵심 테마는 ‘국민이 지킨 역사, 국민이 이끌 나라’다. 또 GS리테일이 운영하는 편의점 GS25에서 취급 중인 도시락 전상품에 여성 독립운동가 51인의 스티커를 제작해 부착하고 있다. 또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4월 11일을 기념해 고객 100명과 임직원 10명이 임시 정부 인사들의 주요 발자취를 따라 가보는 상하이 임시정부 견학도 계획 중이다.

독립운동 후손들을 지원하기 위한 크라우드펀딩 역시 준비중이다. GS리테일과 제조사가 선정한 상품을 고객이 구매할 경우,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를 적립하는방식이다. 적립된 수익금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후원하는 기관을 통해 전달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