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효제 선생에게 당시 거금 1만원 지원···LG, 현충시설 개보수 사업으로 창업주 뜻 이어가

2019년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일본제국주의 억압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지 100년이 흘렀지만 아직 그 정신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생생히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운동사(史)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 중에는 기업인 출신들도 많았다. 민족자본가로 통하는 이들은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거나 물질적 재원을 지원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이 직접 창립하거나 기틀을 마련한 기업들은 지금도 대한민국 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사저널e는 창간 4주년을 맞아 100년 전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 족적을 남긴 기업인들의 면면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구인회 LG창업회장. / 사진=LG
구인회 LG창업회장. / 사진=LG

LG그룹은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기업 중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지난해 과거 독립운동을 지원한 사실이 네티즌들 사이 전파되면서 새삼 다시 독립운동 기업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LG가 독립운동기업으로 주목받는 것은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의 과거 행보 때문이다. 구 회장은 1931년 경남 진주에서 오늘날 LG의 모태인 ‘구인상회’라는 포목상을 창업해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2년 7월 무더웠던 어느 날 한 손님이 찾아와 물었다. “혹시 비단 좀 구할 수 있을까요?”

당시는 전쟁 시기라 물자가 귀해 비단 대신 ‘스후’라는 인조견을 썼다. 경남에서 내로라하는 포목점인 구인상회에서도 비단을 구하기도 힘들어 스후를 쓰고 있었다. 구 회장이 “여기 스후밖에 없는 것 안보이시오”라고 하자 그 손님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날 알아보겠는가.” 구 회장은 깜짝 놀랐다. 그는 ‘백산 안희제’ 선생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구 회장은 안희제 선생을 조용히 가게 안으로 들였다.

안 선생은 유림 사회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혔던 인물이었다. 당시 구 회장과 안 선생은 구면이었지만 20년 만의 만남인지라 구 회장은 쉽게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 선생은 당시 고명한 학자 안효제 교리의 친척동생으로 일찍이 구 회장의 조부 만회 구연호(晩悔 具然鎬) 공과 안효제 교리가 한양에서 같이 지낸 인연으로 친분을 갖고 있었다. 안 교리가 만회공을 만나러 올 때마다 백산 선생 또한 함께 왔었기 때문에 소년기의 구 회장과 수차례 만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안희제 선생은 과거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상해임시정부를 후원하던 독립 운동계의 거물이었다. 192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업했지만, 백산상회는 당시 국내 최대의 독립운동 비밀자금 루트였다. 구 회장의 사돈이자 GS그룹의 뿌리인 허만정 옹이 설립 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안 선생은 백산상회를 차리기 전엔 1909년 서상일, 박중화, 신성모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시베리아를 돌며 독립군 기지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구인회 LG창업회장이 운영하던 포목상점. / 사진=LG
구인회 LG창업회장이 운영하던 포목상점. / 사진=LG

그랬던 안 선생이 구 회장을 찾아온 이유는 이른바 독립자금 때문이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함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는 ‘어떻게 독립자금을 마련하느냐’였다. 치료차 잠시 귀국했던 백산 선생은 만주로 돌아가기 전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구 회장을 찾아갔다. 당시 안 선생이 부탁했던 금액은 1만원. 구인상회 자본금(2000원)의 5배이자 80㎏짜리 쌀 500가마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액수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해당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선 목숨을 내놓는 결심이 필요했다. 안희제 선생은 당시 일제의 블랙리스트와 같은 인물이었다. 지금 우리에겐 독립운동가로 남아있지만, 당시 일제에겐 말 그대로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서슬퍼런 일제 강점기에 그를 접촉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일인데, 독립자금까지 지원했다는 사실이 일제 귀에 들어가게 되면 사업은 물론, 집안 자체를 옹립하기 힘들고 나아가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허나 구 회장은 ‘당할 때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태는 것이야 말로 나라를 돕는 일’이라며 독립자금을 내놓기로 결단을 내렸다. 단순히 손익만을 따지는 기업인의 계산법이 아닌, 그야말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신념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구 회장을 가까이서 보좌한 김영태씨 감수 하에 쓰인 ‘구인회처럼’(이경윤 저)에 따르면 구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밀고 나가는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보통학교(현재 초등학교) 시절 구 회장 학교에선 일본인 교장의 아들과 정진화란 학생 간 싸움이 났다. 이후 선생님이 일본인 교장 아들은 두고 정진화 학생만 혼을 내자 학생의 아버지는 학교로 찾아와 분노를 폭발시켜 소동을 벌였다. 이후 화가 난 일본인 교장이 정진화 학생을 퇴학시키려 하자 학생들이 불공평하다고 들고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섰던 이가 바로 구 회장이었다는 전언이다.

구 회장의 독립자금 지원 결정은 또한 부친인 춘강 구재서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춘강 공은 1930년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일정 구여순(一丁 具汝淳) 선생을 통해 당시 상해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 일화 5000원을 지원한 바 있다. 춘강 공에서 구 회장에 이르기까지 2대에 이어 독립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어쨌든 당시 백산 선생이 국내에서 모금해 중경 임시정부에 보낸 총 자금은 20여만원으로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백산 선생은 결국 일제 경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1943년 숨을 거뒀다.

 

LG하우시스 현충시설 복구 사업으로 재개관한 우당 이회영 기념관을 기념관 관계자 및 관람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 사진=LG
LG하우시스 현충시설 복구 사업으로 재개관한 우당 이회영 기념관을 기념관 관계자 및 관람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 사진=LG

이 같은 LG의 독립운동정신의 특징은 현재까지도 그 얼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현충시설 개보수 사업이다. LG하우시스는 구인회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 받아 2015년부터 현충시설 개보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충칭 임시정부 청사, 서재필기념관, 매헌윤봉길기념관, 우당이회영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만해기념관, 도산안창호기념관 등 총 7곳의 독립운동 관련 시설을 개보수 했다.

또 2016년부터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국가유공자 및 국내외참전용사들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주거환경 개선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올해까지 독립유공자(후손 포함) 8명과 국내 참전용사 8명, 해외 참전용사 3명 등 총 19명을 선정해 주거환경 개선을 지원했다.

LG하우시스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심산 김창숙기념관 개보수 지원을 포함한 독립운동 관련 시설 2곳 시설 개보수, 국가유공자 및 국내외참전용사 6명 자택 주거환경 개선 지원 등 사업역량을 활용한 애국사회공헌 활동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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