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 후 절벽 코앞서 결정…전문가 “SK하이닉스, 아무 것도 안한 것보단 낫다”

이미지=김태길 디자이너

‘혼란 끝에 제자리에서 일단락’ 도시바의 반도체 자회사 매각전 얘기다. 돌고 돌아 ‘한미일연합’이다. 하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결정장애’ 수준이던 도시바 탓에 매각 시너지가 감소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인수합병(M&A) 시장의 관행을 비웃는 듯한 도시바 측 태도가 불신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간접참여 방식으로 나선 SK하이닉스는 당장 큰 수혜를 기대하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각에서는 아무 것도 안한 것보단 나은 선택이라는 시각도 있다. 다만 삼성전자의 독주체제에는 큰 변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21일 도시바는 보도자료를 통해 “베인캐피털 컨소시엄(한미일연합)에 도시바메모리를 매각하기로 이사회에서 결의했다”고 밝혔다. 일본 언론들은 이르면 이날 도시바가 한미일연합과 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다만 SK하이닉스 이사회 의결이 남아있어 실제 계약체결까지는 수일이 더 걸릴 전망이다.

SK하이닉스도 같은 날 국내 금융당국에 “도시바 이사회가 베인캐피털이 포함된 컨소시엄과 매각계약을 체결하기로 결의했다”면서 “아직 주요 사항에 대한 협의가 남은 만큼, 향후 딜 프로세스에 따라 SK하이닉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협상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공시했다.

한미일 연합에는 베인캐피털과 SK하이닉스를 포함해 일본정책투자은행, 일본 민관펀드 산업혁신기구, 미국 애플과 델, 시케이트 등이 참여하고 있다. 도시바는 보도자료에서 인수 가격을 2조엔(한화 20조 1476억원) 수준이라고 밝혔다. 일본 언론들은 의결권 지분구조가 베인캐피탈이 49.9%, 도시바가 40%, 일본기업들 10.1%로 짜여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도시바가 ‘결정장애’를 이어온 탓에 매각 시너지가 떨어지리라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업계 안팎 관계자들은 초기술 산업으로 꼽히는 반도체분야서 업체 간 화학적 결합에 성공하는 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 중 한 관계자는 “반도체라는 게 서로 사이가 좋아도 시너지 내는 게 쉽지 않다. 과거 D램 산업에서도 M&A 이후에 제대로 시너지가 난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도시바 메모리 인수전은 혼전을 거듭했다. 도시바 이사회가 우선협상 대상자를 대우하지 않은 점이 M&A 시장 관행과 정면 배치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달 중순에는 일본 아사히신문 등이 “상장폐지 위기에 몰려 초조한 도시바가 인수 희망자를 대상으로 위험한 도박식 경쟁을 유발한다”는 보도까지 내놨다.

실제 SK하이닉스를 포함한 한미일연합은 지난 6월에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정작 매각협상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건 이달 13일이다.

도시바는 채무 초과 때문에 2018년 3월까지는 매각을 마무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채권은행단은 이달을 계약체결 마지노선으로 봤다. 도시바는 레드라인을 코앞에 두고 절벽 끝에 서서 위험천만한 전략으로 인수가액을 올렸다. 하지만 계약 당사자들 사이서 상당한 피로감을 유발했다. 지금까지는 구도가 도시바 측에 유리했다. 매각 마무리 후에는 비즈니스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은 도박이다.

일단 컨소시엄 참여자인 SK하이닉스가 단기간에 수혜를 입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컨소시엄 주도권을 쥔 베인캐피털에 융자를 제공하는 간접 지분 참여 방식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다른 반도체 기업 손에 도시바 메모리가 넘어가지 않게 한 점이 눈에 보이는 호재로 꼽힌다.

하지만 도시바는 낸드플래시 시장점유율 2위(16.1%)이자 각종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향후 상황에 따라 효과를 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SK하이닉스는 D램 분야서 세계 2위지만 낸드플래시 분야서는 5위(10.6%)에 그치고 있다. 점유율 38%가 넘는 삼성전자와의 격차도 아득하다. 무언가 반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반도체 전문 애널리스트인 이승우 연구원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안하고, (벌고 있는) 돈도 안 쓰고 계속 5위를 할 것인가, 아니면 약간 모험을 시도해볼 것인가. 후자를 택하는 게 맞다고 본다”면서 “(그런 점에서 보면) 인수에 참여하는 게 좋은 것”이라고 풀이했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슈퍼 싸이클을 등에 업고 지난 분기에만 3조원 넘는 영업이익을 벌어들였다. 무리한 투자까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일각에서는 애플이 30억 달러를 들여 컨소시엄에 참여한 점을 더 주목하는 시선도 있다. 애플은 낸드플래시 공급처 다변화를 위해 투자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고성능 스마트폰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기술력 좋은 삼성전자 제품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애플로서는 수직계열화 가능성 뿐 아니라 삼성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계산을 떠올려봄직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삼성전자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은 아직까지 추측에 가깝다. 이승우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워낙 낸드 시장에서 앞서 있다. 또 삼성전자에 낸드 최대 고객은 더 이상 애플이 아니다. EMC다”라면서 “변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과거만큼 애플이 낸드에서 절대적 파워를 갖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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