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조각의 거장, 엄태정 작가가 금속으로 써 내려간 시
한국 현대조각의 거장 엄태정 작가의 작업실은 그가 이루어낸 작은 세계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반짝이는 섬광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것들.
순수 예술 작품은 전혀 아무것도 없는 듯이 탄생해야 해요.
그 대신 작가는 열정, 반짝이는 아이디어, 그리고 집약성,
이 3가지 요소를 통해 욕망과 충동이 스스로를 지휘하게 해야죠.
어떤 것이 만들어졌을 때, 작가 자신은 ‘낯선 자’가 되어
작품을 탄생시키는 거예요.
반짝이는 섬광 속에서 탄생한 세계
자신의 세계를 작품으로 설명하는 작가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엄태정 작가는 매일 작업실로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수행과도 같은 시간. 고된 작업은 작가를 지치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영원히 청년으로 남을 수 있는 원동력을 심어주는 듯하다. 자신의 작업 세계를 천천히, 상세히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젊음’이란 나이로 증명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느낀다.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은 숲으로 둘러싸인, 30년 전 그가 정착한 작은 세계다. 작업실과 거주 공간, 그리고 그의 작품과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미술관까지, 세 동의 건물이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영원히 늙지 않을 것만 같은 예술적 세계를 완성하고 있다. 차가운 금속도 이곳에서 작가의 손길을 거치면 하나의 시로 다시 태어난다.
M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고향은 경북 문경이고 일본 나고야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고 전라도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어요. 한학자인 할아버지 밑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M 아티스트의 꿈은 어떤 계기로 키우게 되었나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 교회에 다녔는데, 그 시절에는 교회가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통로였습니다. 교회를 통해 보이스카우트 활동도 하고 주말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요. 제가 속한 그룹이 ‘다윗반’이었는데, 다윗은 성경에서 장군이고 예언자이고 예술가이거든요. 선생님께서 다윗과 같은 인물이 되라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어느 날 선생님께서 로댕의 《청동시대》 화집을 갖고 오셨는데, 그게 저에게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로댕이 왕으로서, 청년 장군으로서 완벽한 인간상인 다윗을 조각한 것을 저희에게 보여주신 거죠. 초등학생 때이니 조각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못했지만, 후에 제 진로에 큰 영향을 주었죠.
M 조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언제 확실하게 들었나요?
저에게 소묘를 가르쳐주신 고(故) 배동신 작가께서 “너 현대조각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니?”라고 물으셨어요. 제가 알 턱이 없었죠.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알려주시더라고요. 작가의 ‘키스’라는 작품을 일본 잡지에서 보여주시며, 이게 바로 현대조각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로댕만 생각하다가 브랑쿠시를 만났을 때 제 세상이 한 번 더 넓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각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고, 미술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했습니다.
M 조각 안에서도 구상과 추상 등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하셨어요?
조소과에 입학하면 두상부터 반신상, 전신상, 군상까지 인물 조각들을 디벨롭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 후에는 자신이 원하는 콘셉트와 철학을 통해 작업을 발전시키죠. 제가 학교에 재학 중일 때는 일본 현대미술이 굉장히 많은 발전을 했기 때문에 저희 교수진 대부분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분들이었어요. 하지만 거의 인체라는 대상에 갇혀 있었어요. 제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는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사조가 시작되고 있었고, 저는 공간적인 조형 실험을 통해 자유롭게 창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
예술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그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구상이든 추상이든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M 작가님은 어떤 형식의 작업을 추구하셨나요?
브랑쿠시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 예술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사물은 자연물일 수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구상이든 추상이든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구상 작품 역시 단순한 모델링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M 저에게 작가님의 작품은 추상으로 느껴지는데, 처음에 어떻게 콘셉트를 잡으시는지 궁금해요.
추상 작품, “창작품, 즉 사물로서의 예술품은 생각의 안내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어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예술로서 본질적인 단계에서는 낮은 수준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탄생해야 합니다. 구상이 실행에 앞서면 안 돼요. 그러니까 건축 설계가 있고 집이 지어지는 것은 맞지만, 순수 예술 작품은 전혀 아무것도 없는 듯이 탄생해야 해요. 그 대신 작가는 열정, 반짝이는 아이디어, 그리고 집약성, 이 3가지 요소를 통해 욕망과 충동이 스스로를 지휘하게 해야죠. 어떤 것이 만들어졌을 때, 작가 자신은 ‘낯선 자’가 되어 작품을 탄생시키는 거예요.
M 최근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알루미늄 작품을 선보이셨는데, 작품의 소재도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해요.
알루미늄은 2000년도부터 새롭게 사용하기 시작한 재료예요. 처음엔 철, 그 후엔 구리, 그리고 알루미늄까지 온 거죠. 한 재료만 꾸준히 한다기보다는 여러 소재를 활용해서 다양한 실험을 해봅니다. 머릿속에서 무얼 하겠다는 계획은 없지만, 그 재료를 만나서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저도 모르게 새로운 작업이 탄생하게 되는 거죠.
M 평면 작업도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작업을 하면서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이 많죠. 그리고 그 삶은 작업을 통해서 드러나기 마련이고요. 제 평면 작품은 직선을 수없이 많이 긋고 칠을 해서 완성합니다. 중국 둔황(敦煌)을 여행할 때 막고굴이라는 불교 석굴을 만났는데, 거기서 보이는 패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모습들이 하나의 우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런 것들을 작업으로 표현해 보려고 했고, 조용한 저녁 시간에 작업실에 들어가서 몇 시간씩 선을 그리고 패턴을 완성합니다.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저에게는 수행과도 같은 일이에요. 참는 시간, 견뎌내는 시간을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고요.
M 오랫동안 작업하신 시간도 수행처럼 느껴지는데, 작가님께서 일부러 스스로를 견디는 수행의 시간을 꾸준히 가지신다는 점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작가의 길이 쉽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머무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이 더 소중하고 필수적이에요.
MARK TETTO
JTBC〈비정상회담〉의 훈남 패널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 생활 14년 차, 북촌의 한옥 마을에 거주하며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매일 누리고 있다. 경복궁 명예 수문장을 역임하고, 한국 공예품과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 중 한 명. 매달 〈리빙센스〉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editor 심효진
photographer 김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