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주는 만큼 받는 협상’할 때···한미 조선협의체 마련해야”
기술이전·IP 분쟁·조달 규제 우려···SCG 필요성 국회서 급부상 미 조선 인력·수리능력 붕괴···“이번엔 한국이 협상 주도권 가져야” MRO·핵잠 건조 논란까지···“SCG가 유일한 제도적 안전판”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미국이 추진 중인 ‘마스가(MASGA)’ 프로젝트가 한국의 참여를 전제로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제도적 장치 없이 협력이 진행될 경우 한국 조선업의 역할이 ‘하청 기지’ 수준으로 고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스마트조선과 디지털 트윈 등 한국의 핵심 기술이 보호무역 규제와 미국 조달 기준에 갇혀 사실상 통제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기술·정책·규제 전반을 총괄하는 한미 조선협의체(SCG)를 공식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힘을 얻고 있다.
◇ “이번엔 한국이 능동적 협상자 돼야”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따른 한미조선해양협력’ 세미나에서 문근식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늘 조용히 접근해 왔다.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는 방식이었는데, 이번 상황은 다르다“면서 “해군 생활 30년 하면서 미국이 먼저 요청한 건 처음 봤다“고 말했다.
이어 문 교수는 “강력한 보호무역법이 작동하면서 미국은 조선·해양 공급망을 사실상 국내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하지만 인력·기술·수리능력 부족으로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이 구조에서 한국이 전략적 역할을 하려면 주도권을 갖고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조선·해양 전력의 공백이 심화되고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가운데 미국이 실질적 협력 모델을 제안한 만큼 한국이 ‘능동적 협상자’로 나서야 한다는 취지다.
문 교수가 지적한 미국 조선산업의 현실은 심각하다. 미국 숙련 조선기술자는 1980년대 대비 70% 이상 감소했고, 향후 10년간 17만명 이상의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추산된다. 핵잠 미 코네티컷함은 손상 수리에만 63개월이 걸렸다. 미 해군이 신조·정비 모든 분야에서 구조적 병목을 겪자 트럼프 행정부는 조선·방산 기반 복원을 집권 2기 중점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문 교수는 “미국이 급해졌다. 태평양 패권 경쟁에서 중국에 뒤처질 수 없으니 한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주는 만큼 받는 협상’을 할 타이밍”이라고 강조했다.
◇ “SCG 없으면 기술·조달·법제 리스크 그대로 노출”
문 교수는 해법으로 SCG 설립을 제안했다. 문 교수는 “산업부와 미 상무부가 참여하는 고위급 정책위원회와 기술·법제·생산 분과를 둔 실무위원회를 구성해 양국 조선협력의 기본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며 “SCG 없이 마스가에 참여하면 기술이전 분쟁·조달 규정 리스크·노동·환경 기준을 통한 간접 통제에 노출된다”고 말했다.
그 배경으로는 미국의 촘촘한 규제 체계가 있다. 바이 아메리칸법은 핵심 기자재 75% 이상 미국산 사용을 의무화하고, 존스법은 미국 내 항로 상업선의 건조·운항을 미국 조선소와 미국 선원으로 제한한다. 번스–톨레프슨법 때문에 외국 조선소는 미 해군 군함 정비·건조에 원천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다.
이에 천정수 HD현대중공업 특수선사업부 전무는 “한국도 미국이 요구하는 법률적 문제에 대해 함께 풀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며 “SCG가 이 부분을 논의할 공식 창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핵추진잠수함 건조 위치 논란과 관련해서도 SCG가 조율해야 할 사안으로 지목됐다. 문 교수는 “한화필리조선소는 잠수함 건조 동, 방사선 차폐 시설, 원자로 모듈 라인, 보안 체계가 전혀 없다. 10년은 준비해야 한다”며 “한국에서 건조할 경우 5~7년이면 가능하다. 이미 6000톤급 설계의 30% 이상이 진전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계속 미국내 건조를 고집한다면 미국 잠수함 수리 능력이 취약한 점을 활용해 ‘수리 협력–한국 건조 권한’ 형태로 거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MRO, 가장 현실적 진입 분야지만···“장기 일감 없는데 어떻게 투자하나”
“미국이 (협력을) 요청했다는 점에서 분명 기회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시설을 우리가 모두 갖추고 있는지는 현실적으로 따져봐야 합니다.”
이어진 논의에서는 마스가 협력의 가장 현실적인 진입 분야로 꼽히는 함정 MRO(정비·수리·보수) 사업에 대한 구조적 제약이 도마에 올랐다. 한국 조선소들이 뛰어난 신조 기술력을 갖고 있음에도 정비 분야에서는 전용 도크·안벽 확보, 물량 부족, 투자 유인 미흡 등 어려움이 많다는 지적이다.
김대식 한화오션 특수선 MRO사업담당 상무는 한화오션이 이미 네 차례 미 해군 군수지원함을 정비한 경험을 예로 들며 현재 인프라 한계를 구체적으로 짚었다. 김 상무는 “현재 한화오션이 (한 번에) 정비 가능한 물량은 1척 정도”라며 “대형 조선소는 대부분 도크가 신조에 쓰이고, 중소조선소는 군수지원함 크기를 수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물량 없이 설비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했다.
정비 물량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지 않으면 조선소가 MRO 전용 도크에 선제 투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미 해군의 MRO 발주는 정비가 필요할 때마다 개별 계약을 체결하는 ‘단건 계약’ 구조인데, 이 방식으로는 조선소가 선제적으로 도크·안벽을 확보하거나 인력을 확충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즉, MRO 사업은 ‘예측 가능한 물량’이 있어야 시설 투자가 가능하고, 시설 투자가 있어야 대형 군수함까지 수용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설명이다.
김 상무는 “미 해군은 특정 업체를 지정해 5년 정도 기간을 설정하고, 필요할 때마다 그 업체에 정비를 맡기는 방식이 가능하다”며 “이렇게 되면 어느 정도 물량 예측이 가능해지고, 조선소는 계획을 세워 설비·인력 투자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미 해군과 한국 해군이 공동으로 사용할 정비전용 도크·안벽을 구축하는 방안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