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 ‘불신의 벽’을 허물 때
[시사저널e=양성일 전 보건복지부 차관] 국민연금은 대한민국 복지국가의 기둥이다. 그러나 지금 이 제도는 동시에 세대 간 불신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청년은 “내가 낸 연금을 받을 수 있을까”라며 불안을 토로하고, 노인은 “받는 연금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세 차례 굵직한 개혁에도 불신은 가시지 않았다. 이제 연금개혁은 단순한 숫자의 조정이 아니라, 세대가 함께 다시 써 내려가야 할 사회계약의 문제이다.
1988년 국민연금 제도 도입 이후 한국은 세 차례의 큰 변곡점을 지나왔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전국민연금 시대를 열었지만, IMF 외환위기 속에서 제도 도입 초기 낙관적으로 설계된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소득대체율은 70%에서 60%로 낮추고 연금 수급 연령을 65세까지 높였다. 고통스러운 조정이었으나 2033년까지의 장기 시행을 통해 사회적 충격을 최소화했다.
2007년 노무현 정부는 소득대체율을 40%로 낮추는 대신 저소득 노인 지원을 위한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했다. 그러나 보험료율 인상안이 국회에서 무산되면서 반쪽짜리 개혁으로 끝났다. 재정 안정과 보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던 개혁이었다. 2025년 3월에 이루어진 3차 개혁은 2024년 9월 윤석열 정부가 발표했던 국민연금 개혁안이 세대 갈라치기 논란 속에서 정치적 쟁점이 되면서 논란 끝에 야당의 대승적 양보를 바탕으로 여야 합의 하에 이루어진 개혁이었다.
보험료율을 13%까지 단계적으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3%로 고정했으며 국가 지급보장을 법에 명문화하고 출산·군 복무 크레딧을 확대했다. 단순한 수치 조정을 넘어 국가의 책임을 제도적으로 강화한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청년층의 불안과 세대 간 형평성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연금 개혁은 어느 나라에서나 인기 없는 개혁이다. 그러나 몇몇 국가는 사회적 합의와 장기 설계를 통해 위기를 넘어섰다. 스웨덴은 14년에 걸친 정당 간 협력 끝에 1998년 명목확정기여(NDC) 방식을 도입해, 기대수명이 늘면 연금액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장치를 마련했다. 영국은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에 걸친 예측 가능한 개혁을 통해 연금 수급 연령을 2018년 66세, 2028년 67세, 2046년 68세로 단계적 상향하는 로드맵을 마련했다.
캐나다는 3년마다 재정계산을 의무화해 보험료율과 투자전략을 미세 조정해 적립금이 연간 지출액의 일정 배수를 유지하여 장기적인 재정 안정성을 확보했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정치적 대립을 넘어선 합의, 장기적 제도 설계, 인구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장치의 도입이다. 한국의 연금 개혁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지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왜 반복되는 개혁에도 신뢰를 회복하지 못했을까?
첫째, 개혁 시점이 늦었다. 고갈 시점이 임박한 뒤에야 급여율 조정이라는 단기적 수치 조정에 나섰고, 장기적 청사진은 부족했다. 둘째, 국민은 개혁 과정에서 소외되었다. 정부와 국회가 정한 개혁안은 공론화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했다. 청년은 참여의 이유를 찾지 못했고, 노인은 생활 보장이 불충분하다고 느꼈다.
앞으로의 개혁은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추진돼야 한다.
첫째, 다층연금체계의 구축이다. 국민연금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초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을 연계해 공적·사적 노후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인구충격에 유연하게 대응할 제도 도입이다. 경제성장률, 기대수명에 따라 보험료율과 급여를 탄력적으로 조정하되, 연금제도가 성숙하지 못해 급여 수준이 낮은 한국의 현실에서 급여율 조정에 대한 국회의 통제장치를 강화하자.
셋째, 사회적 합의 구조를 세우고 장기적 호흡으로 개혁에 임하자. 청년·노동계·노년층이 모두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 기구를 통해 논의해야 한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수치를 조정하는 방식으로는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현재 운영 중인 국회 연금특위에 지금부터라도 국민 참여 구조를 적극 보완하자.
연금 개혁은 더 이상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신뢰와 세대 간 상생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 있는 사회계약이다. 국민연금 기금 1000조원은 부담이자 동시에 기회다. 합리적인 개혁으로 세대 간 불신을 넘어설 때,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가장 든든한 자산을 남겨줄 수 있을 것이다.
양성일 전 보건복지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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