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계 ‘하투’ 조짐···노란봉투법 처리, 또다른 분수령 되나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조선업계가 ‘하투(夏鬪·여름철 투쟁)’ 조짐으로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호황 국면 속에서 노조는 사상 최대 실적을 근거로 강력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반면, 사측은 피크아웃 우려와 국제정세 불안 등을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정치권의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처리까지 다시 부상하며 노사갈등의 또 다른 변수로 떠올랐다.
3일 업계에 따르면 HD현대중공업 노조는 지난 2일부터 오는 4일까지 전체 조합원 7500여 명을 대상으로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진행하며 파업권 확보 수순을 밟고 있다. HD현대중공업 노조 역사상 파업 찬반투표가 부결된 적은 없었던 만큼 이번에도 파업권 확보가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노조는 기본급 14만1300원 인상, 성과급 산정기준 변경, 정년 연장(최장 65세) 등 요구안을 내놨다.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295% 늘어난 7052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음에도 임금 협상에서 뚜렷한 성과가 없자, 노조는 “사측이 실적은 올랐지만 줄 돈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노조의 움직임은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 등 주요 조선사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에도 주요 조선소들이 부분 파업을 공동으로 벌이면서 조업 차질이 빚어진 바 있다.
한화오션은 최근 하청지회와 협력사 간 임단협 잠정 합의안을 마련하며 고공농성 중이던 김형수 금속노조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이 97일 만에 농성을 해제하는 등 긍정적 모멘텀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하청지회를 중심으로 임금 및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현장에 팽배하다.
◇ 하청지회, 노란봉투법에 거는 기대···임단협 ‘변수’로 급부상
조선업계 하투 조짐은 향후 더 큰 파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크다. 민주노총은 오는 16일과 19일 이틀간 총파업을 예고하며 노란봉투법 재추진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주요 법안 처리를 7월 임시국회로 넘기며 사실상 입법 속도 조절에 들어갔지만, 노란봉투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력한 처리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노란봉투법은 파업으로 발생한 손해에 대해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노란봉투법 시행시 원청이 수천 개 하청 노조와 직접 교섭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하청지회들은 노란봉투법 발의 추이에 따라 임단협 전략을 조정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 법안의 처리 여부가 올해 하투의 강도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 조선업 하청 노조 관계자는 “법안이 처리되는지를 보고 협상 전략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조선업 생산 구조상 하청업체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블록 제작·용접·조립 등 선박 건조의 핵심 공정이 대부분 하청 노동자 손에 달려 있다. 조선업 생산공정의 약 70~80%가 하청 인력에 의해 이뤄지는 셈이다. 지난 2022년 기준 전체 조선업 종사자 가운데 하청 소속 비율은 56%에 달하며, 생산직으로만 한정하면 그 비중은 78%를 넘는다.
블록 단위 생산체계를 가진 조선업 특성상 하청의 파업은 곧장 원청 생산 차질로 이어진다. 하청에서 블록 생산이 멈추면 라인 전체가 중단될 수밖에 없고, 이는 납기 지연과 신뢰도 하락 등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조선업계는 피크아웃 가능성이 현실화하고 있다며 임금 인상보다는 투자 재원 확보와 원가 경쟁력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올해 1~5월 세계 누적 선박 발주량이 전년 대비 42.7%나 급감했고, 클락슨 신조선가지수 역시 지난해 하반기 이후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는 점도 사측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그러나 수주 후 매출 인식까지 시차가 존재하는 조선업 특성상 당분간 매출과 영업이익은 증가세가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노조 측에서는 성과 공유를 지속적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