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실패한 리밸런싱 대신 M&A로 승부수

밥캣·로보틱스 각자 방식으로 시너지 모색 밥캣, ‘2조 실탄’ 바탕으로 수직계열화·AI 투자 병행 로보틱스, 북미·AI M&A로 방향 틀어

2025-06-16     정용석 기자
분당 두산타워 전경. / 사진=두산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두산그룹이 작년 연말 시도했던 지배구조 빅딜은 끝내 무산됐다. 기계와 로봇, 솔루션을 하나로 묶는 ‘미래형 제조 포트폴리오’ 구상이었지만 소액주주의 반발과 시장 불확실성 앞에 뜻을 접었다. 이후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는 각자도생 방식으로 인수합병(M&A)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실패한 리밸런싱의 동력을 다른 방식으로 살리는 셈이다.

◇ ‘밥캣 품는 로보틱스’ 시나리오 좌초

두산그룹이 설계한 지배구조 개편안의 핵심은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의 자회사로 편입하는 구조였다. 이를 위해 그룹은 두산에너빌리티를 인적분할해 밥캣 지분을 신설 법인에 넘기고, 이 신설 법인을 로보틱스와 합병하는 딜을 설계했다. 결과적으로 두산은 기계·로봇·AI를 아우르는 수직 통합 구조를 확보, 두산밥캣의 성장성과 두산로보틱스의 미래 먹거리를 동시에 끌어안는 그림이었다.

시장은 냉정했다. 소액주주 반발과 함께 갑작스러운 비상계엄령 발동 이후 원전 테마주인 두산에너빌리티 주가가 급락하고 주식매수청구권 부담이 폭증했다. 소액주주 10%만 권리를 행사해도 재무부담이 두 배로 불어나는 구조였다. 국민연금이 찬성 의견을 내며 한때는 성사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기도 했지만, 결국 그룹은 “시장 불확실성에 따른 신중한 결정”이라며 임시 주총을 철회했다. 이로써 밥캣과 로보틱스를 묶는 리밸런싱은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 논리였던 두산밥캣의 체질개선 필요성과 두산로보틱스의 성장 가능성, 그리고 양사 간 시너지 전략은 여전히 유효했다. 양사는 전혀 다른 방식의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스캇 박 두산밥캣 부회장이 지난 2월10일 '인베스터 데이' 행사에서 성장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두산밥캣

◇ 두산밥캣, ‘현금 보유+신용등급’으로 M&A 정공법

두산밥캣의 자금력, 두산로보틱스의 기술 확장성, 그리고 그룹 차원의 ‘AI 기반 통합제조’ 전략은 지금도 양사의 개별 행보 속에 살아 있다는 평가다.

두산밥캣은 탄탄한 재무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M&A 행보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두산밥캣의 현금성자산은 1조6000억원에 육박하며, 순차입금은 마이너스(-)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보유 현금이 총 차입금을 초과하는 순현금 기업 구조로, 외부 차입 없이도 대규모 인수 자금 집행이 가능한 상태로 평가된다.

부채비율도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부채비율은 74% 수준으로 글로벌 기계장비 업체 평균과 비교해 한참 낮은 편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두산밥캣은 최근 국내 신용평가사인 한국기업평가로부터 AA-(안정적) 등급까지 확보하며 자금조달 여력도 넓혔다. 북미에 본사를 둔 두산밥캣이 한국에서 기업신용등급을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업계어선 이미 순현금 상태임에도 굳이 신용등급을 취득했다는 점을 두고 “M&A를 위한 본격적인 실탄 확보 시그널”로 해석하고 있다.

두산밥캣의 전략은 ‘기존 기계 사업의 수직계열화’에서 ‘인공지능(AI) 기반 자동화·무인화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회사 내부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은 명확히 드러난다.

두산밥캣은 지난 2023년 그룹 내 유압기기 전문 자회사인 두산모트롤을 약 2421억원에 재인수하며 건설기계 부문 수직계열화를 단행했다. 이후 회사는 자동화·무인화 기술 확보, AI 기반 작업장 제어 등으로 사업 확장을 염두에 두고 후속 인수 대상을 물색 중이다. 미국 애그테크 스타트업 애그토노미에 지분 투자해 AI 기반 전기 트랙터를 공동개발하고, 세계 최대 가전 IT 전시회 ‘CES 2024’에선 자율작업이 가능한 전기 트랙터 AT450X도 공개했다.

M&A와 전략적 투자 모두에서 ‘미래형 기계기업’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밥캣이 캐터필러·존디어처럼 로봇 솔루션 업체를 인수할 가능성도 제기한다.

김민표 두산로보틱스 대표. /사진=두산로보틱스

◇ 두산로보틱스, ‘의존 전략’ 대신 ‘자립 M&A’로

두산로보틱스는 밥캣 인수 무산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두산밥캣이 로보틱스 자회사로 편입될 경우 연간 배당금 700억~1000억원 수준이 고스란히 유입돼 만성 적자구조를 단숨에 해소할 수 있었다. 딜 무산 이후 두산로보틱스는 ‘자생 전략’을 짜고 있다.

가장 먼저 선택한 카드는 AI 중심의 기술 내재화다. 두산로보틱스는 기업공개(IPO) 이후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줄었고, 영업손실 폭도 2배가량 커졌다. 제품 전 라인업(E, A, M, H시리즈)의 판매도 크게 위축됐다. 미국발 관세 정책과 글로벌 제조경기 둔화가 발목을 잡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두산로보틱스는 올 3분기 내 북미 솔루션 기업 M&A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IPO 당시 확보한 자금 중 2850억원을 타법인 투자에 배정해둔 상태지만, 아직 실질 집행 사례는 없다. 회사는 올해 안에 휴머노이드·지능형 AI 기술 확보를 위한 조직 신설과 인력 25% 재배치를 단행할 계획이다.

두산밥캣과의 직접적인 연결은 무산됐지만, 영업 시너지는 여전히 유효한 카드다. 두산밥캣이 보유한 북미 네트워크(딜러 1500여 개)를 활용해 로봇 솔루션 수출 경로를 넓히겠다는 것이다. 로보틱스는 최근 “두산밥캣 딜러사 9곳과 추가 협의 중”이라며 양사 간 영업 채널 공유를 시사했다. 물리적 지배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전략적 동맹’ 형태 제휴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