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오션’이라더니 ‘생존’ 급급···흔들리는 전기차 충전기 시장
적자 규모 확대 SK시그넷, 매각설 돌기도 가격 중심 경쟁 구조 시작···"버티기 힘들다" 전문가 "충전 '마일리지' 지급하는 정책 필요"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최근 20명 정도가 해고됐고 미국 팔로알토 사무실도 정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있다.”
미국 전기차 충전업체 에버차지(Evercharge) 직원들은 최근 미국의 익명 직장평가 플랫폼인 ‘글래스도어’에 이같은 평가를 남겼다. 이 회사는 지난 2022년 SK이노베이션 E&S가 미국 투자회사 패스키를 통해 인수한 전기차 충전업체다. 투입된 자금만 5000억원이 넘는다. 일부 직원들은 회사를 ‘침몰하는 배’라고 평가하며 불안감을 표출하고 있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전기차 충전 사업은 대기업들이 ‘블루오션’으로 판단해 앞다퉈 뛰어들었던 분야다. 그러나 최근 기업들은 투자 속도조절에 나섰거나 ‘후퇴’를 결단하고 있다.
◇ “돈 벌기 쉽지 않네”···SK·LG·롯데도 고전
전기차 충전 사업으로 돈을 버는 기업은 많지 않다. 16일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SK시그넷은 지난해 영업손실 2427억원을 기록하며 전년(-1491억원) 대비 적자 규모가 60% 넘게 불어났다. 2년 전 88%에 이르렀던 공장 가동률은 지난해 30% 초반대까지 뚝 떨어졌다. 미국 초급속 충전기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조차 적자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자 SK시그넷은 지난달 직원들을 대상으로 첫 희망퇴직 신청까지 받았다. 매각설도 불거졌다. 전날 SK측은 “SK시그넷은 매각 대상이 아니며 경영효율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롯데이노베이트의 자회사 이브이시스도 적자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23년 26억원대에 머물렀던 영업손실 규모는 지난해 133억원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시장 철수를 결정한 곳도 있다. LG전자는 지난 2022년 전기차 충전기 전문 업체 하이비차저(옛 애플망고)를 인수하며 이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전기차 시장 성장 둔화로 손해만 봤다. 지난해 하이비차저는 영업손실 72억원을 기록했고 2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기록해 감사보고서는 ‘의견 거절’을 받았다. 하이비차저는 LG전자에 인수된 지 3년 만에 청산 절차를 밟는다.
한화큐셀도 최근 전기차 충전기 1만6000여기와 관련 자산을 플러그링크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 캐즘에 치이고 수익성은 낮고
기업들이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다. 전기차 시장은 2020년대 초반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왔지만 2023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성장이 둔화하며 캐즘 구간에 진입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보급 속도 둔화와 함께 충전 인프라 확충이 지연됐고, 이는 충전기 업체들의 수익성 감소로 직결됐다.
전기차 충전 사업은 ‘돈 먹는 하마’면서도 ‘회수율’이 낮은 사업이다. 초고속 충전기 한 대에만 수천만원이 드는 데다 전력망 구축 등 인프라 투자 비용까지 발생한다. 한 전기차 충전 사업 관계자는 “특히 초고속 충전기 사업의 경우 충전기뿐만 아니라 인프라 투자까지 함께 해야 한다”면서 “막대한 투자 비용이 들어가는데 충전비용에서 마진을 남겨 수익을 내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 中 저가 공세 시작되나
문제는 한국 기업들의 빈자리를 중국이 매섭게 치고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중국산 충전기는 파워 모듈의 핵심 부품의 효율성이 낮고 고장도 잦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중국 안에서만 1280만기가 넘는 충전기가 보급되면서 노하우를 축적했고, 연구개발 투자로 기술 수준이 크게 올라왔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중국 BYD, CATL, 지커 등은 초고속 충전 네트워크를 공격적으로 확장하며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충전기 사업은 보조금 없이는 진입하기 힘든 사업”이라며 “이런 시장에선 같은 품질이라면 더 저렴한 제품이 경쟁력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러 기업들이 진출하면서 가격 중심의 경쟁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도 사업을 어렵게 한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전기차 충전 사업이 자리를 잡기 위해선 ‘마일리지’ 형태의 보조금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 충전기 설치 시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보다는 ‘얼마나 충전을 하느냐’에 따라 사업자와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전기차를 사놓고 많이 탈수록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저감되는 구조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면서 “전기차 충전을 더 많이 할수록 충전 사업자와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면 전기차 시장에 대한 유인책이 커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