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반도체 씨름에 패닉 빠진 韓 기업 딜레마
반도체 관세 압박, 칩스법 폐지 가능성에 불확실성↑ 韓, 기술 자립 시급···정부 나서 공급망 불안정 대응해야
[시사저널e=고명훈 기자]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이 투자 방향을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도체 관세 압박과 칩스법(반도체 지원법) 폐지에 대한 우려까지 겹치면서 기존 생산거점 다각화 전략을 유지할지, 미국 투자를 강화할지에 대한 판단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반면 글로벌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TSMC는 미국에 대규모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
7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30년 전세계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캐파) 에서 미국의 점유율은 22%로 대폭 상승할 전망이다. 대만이 여전히 58%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미국의 약진이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점유율은 7%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중은국 5%, 일본 4% 점유율이 전망됐다.
지난 2021년 기준 생산능력 점유율은 대만 71%, 한국 12%, 미국 11%, 중국 6% 등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美 투자 확대해야?···“판단 어려워”
이같은 변화에는 TSMC 미국 투자 확대가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TSMC는 기존 650억달러(약 94조원)였던 애리조나 공장 투자 계획을 총 1650억달러(약 240조원)로 대폭 늘리며 5개의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을 구축할 예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미국 내 공장을 건설 중이지만 트럼프 대통령 정부 출범 이후 추가 투자 발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히려 지난해 말 발표했던 450억달러(약 65조원) 수준의 테일러 공장 투자 계획을 370억달러(약 53조원)로 축소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칩스법 보조금도 64억달러(약 9조원)에서 47억5000만달러(약 7조원)로 줄어들다.
전재민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본부장은 “미국에서 반도체 품목 관세를 부과하고, 칩스법 폐지에 대한 움직임까지 있어 굉장히 걱정되는 게 사실인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며 “TSMC의 경우 미국으로부터 관세에 대한 압박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받는 곳이다 보니, 우리와는 환경에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할 수 있는 것 다 해야”···정부 규제 완화 한목소리
전 본부장은 “앞서 이런 관세 얘기가 없었을 때도 한국 반도체의 강점이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중국이 다 따라왔으며 전 세계가 달려들어서 반도체에 투자하는 상황에서 우리 힘이 많이 약해졌다”며 “생태계를 만들고 원천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 타 업종 간의 협업, 인재 양성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톱니가 돌 듯이 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업계에서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정부의 규제 완화가 필수적이란 목소리가 커졌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대학원장 교수(한국경영학회 부회장)는 전날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 “반도체는 기술력 회복이 가장 중요한데, 이미 파운드리는 TSMC에, 설계는 미국, 장비는 일본과 유럽 등으로 쪼개져 있다”며 “그렇지 않아도 기업 환경이 어려운 환경에서 정부는 지원이 어렵다면 적어도 규제는 하지 말아야 한다. 갈수록 더 힘든 규제 관련 법들이 들어와 기업들이 투자하기 벅찬 상황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 기업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도록 쓸데없는 규제는 과감히 없애야 한다”며, “우리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학에서 좋은 기술이 나오면 바로 상용화해야 하며, 핵심 부품·소재 국산화를 추진해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에 대응해야 한다. 연구개발 지원과 시범 생산 확대, 투자 인센티브 등을 제공해 기술 자립도를 높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계는 대기업을 배제한 지원 정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했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박사는 “대기업 없이 주력산업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규제에서 산업 지원이나 세액 공제 내용을 보면 대부분 대기업은 배제되고 중소기업에 대한 비중이 굉장히 높다”며 “민간 기업 혁신 연구개발(R&D)의 70% 이상이 대기업에서 나오고 있는데, OECD 국가 중 한국만큼 R&D 부문 세액 공제가 낮은 곳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특별법에서 얘기하는 노동시간 52시간 완화도 대기업 특혜라고 얘기가 나오는데, 이렇게 되면 앞으로도 법안이 발의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항상 이 문제가 걸리게 될 것”이라며 “규제는 큰 목적이 있지만, 그 목적 자체가 국가 산업 기술 패권을 두고 봤을 때 적절한 것이 맞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