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만화 덕후들의 성지가 된 '그래픽' 공간사용설명서

읽지 않으면 모르는 공간을 탐험하는 재미, 공간사용설명서 11

2024-09-13     Living sense

그래픽 

만화책과 위스키를 좋아하는 두 사람의 운명 같은 조우. 서로 닮은 건축가와 의뢰인이 만나 자신들과 비슷한 취향을 지닌 사람이 모이는 아지트를 탄생시켰다. 어느 날 경리단길에 묵직한 존재감으로 등장한 그래픽. 이곳으로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의 이슬 팀장과 떠났다.

이슬

김종유 소장이 이끄는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U.lab입사 10년차가 된 팀장 디자이너. 오온의 건축 프로젝트와 유랩의인테리어 프로젝트 작업을 모두 겸한다. ‘그래픽'의 PM 을 맡았다. 늘 도전을 즐기는 유랩의 일원답게 최근에는 새롭게도예에 빠져있다.

마음 맞는 사람과 만난다는 작지만 큰 기적. 그 기적이 한적하던 경리단길에 사람들이 기다림을 감수하고 찾는 ‘그래픽@graphic.fan’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가 공간 디자이너 김종유에게 오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김종유 소장은 이전까지 청담동 미엘과 같은 F&B 공간을 주로 설계한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의 대표 소장. 당시 15년간 운영해 온 유랩에 이어 건축사무소 오온을 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단골 바 사장님이 한 사람을 소개해 줬다. 그때를 유랩 이슬 팀장은 이렇게 회상한다. “한남동에 ‘블라인드피그’라는 프라이빗한 위스키 바가 있어요. 그곳 사장님이 경리단길에 건물을 지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고 소장님께 한번 만나보라 한 거죠. 서로 취향이 비슷해 보인다면서요. 지금 그래픽의 클라이언트였습니다. “실제 만남이 성사된 건 꽤 시간이 흐른 이후로, 의뢰인이 또 다른 건축사무소에서 온전한 설계 시안을 받은 시점이었다. 어쨌든 왜 이제 만났는지 모를 정도로 위스키, 책 취향이 똑 닮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오랜 친구처럼 마음이 맞았던 둘. 결국 의뢰인이 기존 설계안의 비용을 지불하고 김종유 소장에게 그 공간에 만화방을 만들자고 새롭게 제안했다. 그렇게 오온 건축사무소의 첫 건축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당시 만화와 소설의 중간점에 있는 그래픽노블 장르의 책을 술과 함께 즐기는 곳은 흔치 않았던 터. 김종유 소장은 그에게 익숙한 공간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사람마다 책 읽기 편한 자세를 연구하는 것에서 시작해 건축 설계로까지 확장해 나갔다. 1층과 2층에는 그래픽노블을 주축으로, 3층에는 위스키 바 자리도 추가했다. 건물 내외장재로 쓰인 독특한 소재는 김종유 소장의 할아버지가 물려준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 “어느 날 소장님이 작은 사전을 하나 들고 왔는데, 얼룩지고 습기 때문에 종이가 울긋불긋 일어났는데도 그게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몰라요.” 이슬 팀장은 그때 ‘시간의 적층’이라는 콘셉트가 나왔다고 말한다. 세월의 흔적이 쌓이면서 멋스럽게 변한 책의 질감. 그 느낌을 건물에 구현하기 위해 도예 작가 문평을 섭외하고 소재도 개발했다. 그렇게 우둘투둘한 고서의 표면을 닮은 그래픽의 외관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멍석 느낌이 나도록 ‘사이잘삼’ 소재로 바닥재를 만들고, 빈티지한 느낌의 구로철로 선반도 제작했다. 여기에 거친 질감을 살려 페인팅한 벽까지 더해지자 어떤 책방에서도 볼 수 없던 검박하고 편안한 공간이 완성됐다. 

처음 그래픽의 대표와 김종유 소장이 “술 마시는 만화방”을 만들자며 도원결의한 시점부터 완성까지 총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규모에 비하면 길다면 긴 기간이다. 그 사이 코로나19가 유행하며 문평 작가와 신소재를 만들던 중국 공장이 1년 넘게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에도 비로소 세상에 나온 그래픽은 등장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마치 이러한 공간이 도시에 등장하길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김종유 소장은 이런 도전을 가능케 한 클라이언트에게 프로젝트 마지막 단계에서 이광무 웹툰 작가가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단편 만화 <그래픽>을 선물했다. 이 모든 과정을 돌이켜보면, 아무래도 취향이 일치하는 상대를 만난다는 건 인생에서 선물과도 같은 일이 분명하다. 그래픽은 현재 위례에 2호점을 준비하고 있다.

김종유 소장이 이광무 웹툰 작가에게 의뢰하여 새롭게 제작한 단편만화, 작품명의 한 장면이다.

 

흘러가는 시간은 절대적이죠. 

이곳도 철저하게 깨끗이 관리된 공간으로 남기보다는 지금보다 

금속은 부식되고, 바닥은 더 이염되길 바라요.

언젠가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어도,

나와 함께 나이 든 이 공간에서 지나간 세월을 느낄 수 있게요.

그러니 이 기사를 읽는 지금이 바로 그래픽을 방문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이슬 팀장이 추천하는 방문 시간대는 평일 저녁. 퇴근후 위스키 한잔과 함께 책을 읽길 권한다. 3층에서는 스피커와 가장 가까운 위스키바 자리에 앉아볼것. 인스타그램에 주기적으로 플레이리스트를 업로드하는 그래픽의 감각적인선곡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Kangmingu
책을 읽을 때 저마다 앉는 자세가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공간 구획을 시작한 그래픽 프로젝트. 이곳에는 통상적인 계단 폭인 180mm부터 바 좌석에 해당하는 620mm까지 높이를 다양하게 설정해 저마다 각자에게 편한 자세로 책을 읽길 바랐다.이를 위해 정형화된 의자 사이즈인 420mm는 물론이고 가구 일부는 유랩에서 새롭게 제작했다. 1층에는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멍석 느낌의 쿠션감 있는 바닥재를 깔았다.
테이블에 엎드려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책을 읽는 의뢰인의 의견을 반영한 공간이다. 테이블은 정자세로 앉았을 때 편안하게 느끼는 일반적인 높이인 750mm가 아니라 조금 더 몸을 숙였을 때 안정적인 550mm 높이로 설정해 새롭게 제작한 것.
낮에 주로 방문하는 서점과 밤에 들르는 술집. 두 낯선 공간을 어떻게 융합시킬지 고민하던 건축가는, 흘러가는 자연에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확보한 넓은 보이드 공간과 천장을 통해 낮이면 햇볕이, 밤이면 어둠이 밀려온다. 덕분에 고개를 들면 벽으로 막힌 실내에서도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
고서를 닮은 세라믹 마감재. 이는 외벽은 물론 실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장재가 내장재가 되고, 내장재가 외장재가 되며 둘 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데, 이는 김종유 소장의 공간 철학 중 하나.
실내 마감재로는 빛을 받았을 때 시각적인 재미를 줄 수 있도록 거칠고 투박한 질감을 주는 제품들을 주로 택했다. 사진은 페인트를 질감 있게 처리하는 스페셜 페인팅 기법으로 마감한 것.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공간. 작은 틈사이로 흘러나오는 빛을 따라 걷다 보면 방문객은 정면이 아닌 왼편에서 자동문이 열리는것을 깨닫고 흠칫 놀라게 된다. 이런 의외성 하나가 이곳을 사람들에게 더 깊이 각인시킨다. SNS 사진 너머로 보는 공간이 아닌, 실제로 방문하고 체험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건축가의 마음이 담겼다.
골목 사거리에 위치한 그래픽. 정사각형 건물이 이곳에 세워진다면 오가는 사람들의 동선을 방해할 것으로 생각해, 일부러 외벽을 곡선으로 둥글려서 처리했다. 또한 전깃줄과 다세대 주택으로 어수선했던 주변을 가리기 위해 벽에 창을 일절 내지 않고, 그대신 오직 천장에서만 빛이 들어오게 했다. 케이크 구조로 쌓아 올리면서 생긴 천장의 틈 사이로 빛이 흘러들어와 조명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픽 

ARCHITECTURE 오온oonn.co.kr INTERIOR 유랩designstudioulab.com
위치 서울시 용산구 회나무로39길 33이태원동
운영 시간 화·수·금요일 오후 1시~오후 11시, 목·토·일요일 오전 11시~오후 11시 


CREDIT INFO

editor    권새봄
photographer    김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