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장면들을 간직한 이민규, 이다정 씨 부부의 집
여행길이나 출장길,혹은 전시장에서 연을 맺은 물건들이 찬장 안에, 책장 위에, 화분 옆에 조용히 서 있다. 이민규·이다정 씨 부부의 집은 사물 하나하나가 하고픈 말을 간직한 커다란 앨범처럼, 지난 삶의 장면을 두루 펼쳐 보여준다.
‘집다운 집’을 위한 여정
IT 디자이너 이민규 씨와 브랜딩 디자이너 이다정 씨 부부는 결혼 후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코로나19 시기에 분가를 결정했다. 두 사람만의 보금자리를 꾸린 지 벌써 4년. 신축 아파트라 크게 손 댈 곳은 없었지만, 거실의 대리석 아트 월과 중앙등을 철거하고 집 전체를 화이트로 도배했다. 부부는 깨끗한 밑바탕을 만드는 작업이면 충분하다 여겼다. 인테리어를 구상할 때 특정 콘셉트나 스타일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목표는 단 한 가지, ‘집다운 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카페 같은 집, 갤러리 같은 집, 호텔 같은 집 말고, 말 그대로 집다운 집이기를 바랐어요. 소파, 조명, 탁자 하나하나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취향인지’ 함께 상의하고 고심하며 고르는 일이 전부였죠.”
집에 밝고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 노란색 패브릭 소파는 헤이HAY의 맥스 로우Mags Low 제품. 컬러가 고민이었는데, 때마침 아내 이다정 씨가 일본 출장 중 헤이 매장에 들렀을 때 이 컬러가 눈에 들어왔다. 배송하는 데 몇 개월이 걸린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공간을 빨리 채우는 것보다 분명하게 원하는 바를 가지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거실의 메인 조명은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네모NEMO의 랑프 드 마르세유 벽 조명이다. 당시 한국에 공식 수입사가 없어 직구로 구매한 뒤 보관했다가 이사를 하고 설치했다. “프랑스 마르세유에 위치한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에 달려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현대식 아파트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건축물이니, 우리나라 아파트 형태에 적용해도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소파 앞과 옆으로 둔 협탁들은 모두 프랑스 디자이너 앙드레 소르네André Sornay의 빈티지 가구들이다. 가격이 부담스러워 고민이 많았지만, 며칠째 그림자처럼 눈에 아른거려 결국 다시 매장을 찾아갔다. “르메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크리스토퍼 르메르Christophe Lemaire의 집 인테리어를 봤는데, 이런 묵직한 테이블이 동양적이면서 서양적인 오묘한 분위기를 내더라고요.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죠(웃음).”
우리 두 사람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 그대로 ‘집다운 집’이기를 바랐어요.
함께 상의하고 고심하며 고른 것들이 하나둘 쌓이다보면
좀 더 우리다운 집이 되고, 우리만의 아이덴티티도
선명해질 거라 생각해요.
두 사람만의 특별한 아카이브
익숙한 듯 낯선 모습의 다이닝 테이블도 흥미롭다. 부부는 빈티지 숍 터프스튜디오에서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의 디자인으로 추정되는 테이블 다리를 발견했다. 에로 사리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여부는 대수롭지 않았다. 오리지널처럼 보이기 위해 부러 상판을 화이트나 대리석으로 맞추지 않았다. 그 위에 올려진 것은 짙은 컬러의 자작나무 상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커스텀 테이블인 셈이다. 큼직한 가구뿐 아니라 작은 오브제 하나에도 부부의 시절과 마음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TWL 전시에서 만난 허상욱 작가의 분청 그릇은 푸른 용이 그려져 있어 용띠인 아내에게 딱이라고 여겨 구매했고, 최희주 작가 전시를 방문했을 땐 돌을 쌓아 올린 모양의 패브릭 모빌을 보고 하루하루 행복을 쌓는다는 의미가 좋아 거실에 들였다.
이민규 씨의 서재 공간은 더욱 본격적으로 물음표를 던진다. 팔에 고질라 문신이 있을 정도로 고질라 마니아인 그가 수집한 피규어와 식물들이 임스 책장 위를 빼곡히 점령했다. “고질라는 사실 악당이 아니에요. 강력한 힘을 지닌 고질라의 귀여운 매력에 빠졌다고나 할까 요?(웃음)” 호텔 르 코르뷔지에의 룸 키 모양 굿즈, 런던 에이스 호텔에 놓여 있던 신문지로 맞춘 액자까지. 별 볼 일 없이 지나칠 물건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순간을 포착한 수집력은 두터운 앨범에서도 드러난다. 여행하며 모은 각종 티켓과 수증, 브로슈어, 심지어 컵에 달렸던 종이 링도 버리지 않고 고이 보관한 앨범. 부부의 추억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기억의 화소를 선명하게 해주는 도구이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하나씩 쌓아온 아카이브가 나중에 언젠가는 그 진가를 발휘하듯이, 이렇게 무언가 계속 쌓아가다 보면 좀 더 우리다운 집이 되고, 우리만의 아이덴티티도 뚜렷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들 부부를 만나고 나니 나무에게도 바람에게도 동물에게도, 자연의 모든 사 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인디언이 떠올랐다. 비록 살아 움직이지 않아 도 물건들 나름의 태도와 표정이 있다. 때로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 오기도 한다. 오늘처럼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editor 이승민
photographer 김잔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