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실거주 의무폐지, 선거용 공수표로 전락해선 안 된다

자금계획 어그러질 위기 4만여 가구, 여야 의견 합치 시급

2024-01-08     노경은 기자
노경은 금융투자부 기자

[시사저널e=노경은 기자] 정부의 실거주 의무 폐지 말만 믿고 내집마련을 시도한 이들은 해를 넘겨도 맘 편할 날이 없다. 지난달부터 수 차례 어그러진 실거주 의무폐지를 담은 주택법 개정안이 하루 뒤인 9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법안소위)에서 한 차례 더 논의된다. 여당은 이날도 야당에 대승적이고 전향적인 협조를 부탁한다며 조속한 주택법 개정안의 처리를 요청했지만 그간 그래왔듯 의견이 합치되리라 예상하는 이들은 드물다.

실거주 의무란 말 그대로 분양받은 아파트에 살아야 하는 의무를 지는 것이다. 지난해 1월 3일 국토교통부는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면서 전매제한 기간 완화와 함께 수도권 분양가 상한제 주택 실거주 의무 폐지를 발표했다. 시들어가는 분양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차원이었다. 당장 집을 살 돈이 100% 마련돼있지 않더라도 실거주 의무 조항이 폐지되면 잔금 시점에는 세입자를 들여 보증금으로 비용을 충당할 수 있으니 집을 분양받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당시 국토부는 조치계획도 밝혔다. 전매제한 완화와 관련해선 주택법 시행령 개정사항으로써 즉시 개정에 착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거주 의무 폐지에 대해서는 주택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법 개정 이전에 실거주 의무가 이미 부과된 경우에도 개정 법률을 소급해 적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 문구는 마치 주택법 개정이 국회와 사전협의는 다 되고 행정적 절차만 남은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의 상황에서 볼 수 있듯 협치 없이 말만 앞섰던 것이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정책적 판단 근거는 차치하고 국토부의 실책도 크다고 입을 모은다. 주택법 개정이 이뤄진 후, 하다못해 대책 발표 이전에 국회와 충분한 논의가 된 후 발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실제 정부가 내놓은 정책이지만 계획대로 이행되지 못한 피해는 정부 발표를 믿은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실거주 의무가 적용된 아파트는 올림픽파크 포레온(둔촌주공 재건축)을 포함해 전국 66개 단지, 약 4만4000가구다. 실거주 의무 폐지가 통과되지 않으면 이들의 상당수는 당초 계획했던 자금계획안 및 거주 계획이 어그러진다.

수분양자들에게만 피해가 있을 것 같지만 시장 전반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다. 일반적으로 입주단지에서 전체 물량의 절반가량이 전세 매물로 나와 그 주변 전셋값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전세시장에 매물이 덜 나오니 전셋값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 정책발표에 신뢰가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다. 정부의 발표만 믿고 주택을 분양받았는데 실거주의무 폐지가 통과되지 않으면 전세를 놓아 잔금을 치르거나 집을 파는 경우 1000만원 이하 벌금 또는 1년 이하 징역에 처해진다. 또 아파트도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분양가 수준으로 되팔아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살면서 가장 큰 소비가 내집마련이다. 그만큼 결정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정부의 발표를 믿은 오판으로 인해 마음도, 자금상환 계획도 불안정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충분하다. 선거용 공수표였다는 힐난을 피하려면 정부여당은 야당의 협조를 구해 하루 빨리 실거주 의무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