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따가워도 돈 되는 곳 가야”···한국 떠나는 배터리·석유화학

사업 구조조정 나선 석화업계···이차전지·고부가 제품 신사업, 북미·아시아 진출 배터리 3사, 국내 생산 비중 한 자릿수···해외-국내 생산규모 격차 더욱 커질 전망 미국, 반도체법·인플레이션 감축법 등 2조달러 지원책···첨단산업 기업들 '북미행' 인도네시아·태국 등 아시아 국가도 법인세 감면 등 파격 지원책 마련 업계 "국내 산업 보호 위해선 세액공제·보조금 혜택 늘려야···산업 성장 가로막는 규제 철폐도 시급"

2023-08-14     정용석 기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8월16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기후변화 대응과 의료보장 확충 등을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했다. 바이든 대통령 뒤로 왼쪽부터 조 맨친 상원의원, 척 슈머 상원의원, 제임스 클리번 하원의원, 프랭크 펄론 하원의원, 캐시 캐스터 하원의원. /사진=연합뉴스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국내 투자를 줄인다는 따가운 시선도 받지만, 각종 규제와 인센티브 여건을 생각하면 해외 진출이 여러모로 유리한 게 사실이다.”

14일 국내 A 석유화학업체의 한 관계자는 최근 신사업 추진에 따른 해외 거점 마련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액공제를 비롯해 시장 규모를 고려하면 국내에 묶일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 회사는 연내 해외 생산시설 구축안을 발표하고 투자에 나설 방침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 및 중국발 공급 과잉에 따라 업황 악화를 겪고 있는 석유화학업계는 이차전지 소재를 비롯한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단행 중이다. 신사업을 위한 대규모 설비투자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데, 주로 북미와 동남아가 이들의 진출 무대가 되고 있다.

석유화학 업계는 성장 가능성이 큰 첨단소재 분야에서 북미향 대규모 투자를 앞두고 있다. LG화학은 미국 테네시주에 건설하는 양극재 공장에만 30억달러(약 4조원)을 투입한다. 오는 2025년 가동이 목표인 이 공장의 생산 규모는 연산 12만톤(t) 규모다. 이는 2030년 이 회사 전체 양극재 예상 생산량(50만t)의 25%에 이른다. 

배터리 4대 소재인 분리막 부문도 해외 영토 확장에 집중한다. LG화학은 지난 5월부터 헝가리 현지 공장에서 분리막 원단 생산에 나섰고 연내 북미 현지 투자도 확정할 계획이다. 롯데케미칼의 분리막 자회사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아시아를 비롯해 북미에 생산 설비를 확보하고 공급망을 안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배터리 셀 업체의 경우 ‘탈한국’ 바람이 더 거세다. SK증권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3사의 올해 말 국내 배터리 생산능력 비중은 SK온 5%, LG에너지솔루션 8% 등으로 예측돼 해외 생산 비중이 90%를 넘겼다. 

북미향 증설 일정이 쌓이면서 향후 그 격차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반면 LG에너지솔루션이 지난 4월 충북 오창공장 증설 계획을 발표한 뒤 이렇다 할 국내 생산시설 확충 계획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2030년 국내 배터리 3사의 미국 내 셀 생산능력은 706GWh가량으로 국내 예상 생산 규모(52GWh)를 크게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북미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등 풍부한 광물자원을 보유한 동남아 지역도 국내 제조업의 영토 확장 대상이다. LG에너지솔루션이 이끄는 ‘인도네시아 배터리 컨소시엄’은 올해 안에 인도네시아 양극재 공장 착공에 들어간다. 배터리 컨소시엄은 인도네시아에 배터리 핵심 광물 정·제련 시설과 양극재 및 전구체 생산 공장, 배터리 셀 생산 공장 설립을 통한 배터리 밸류체인을 구축한다. 투자 규모는 98억달러(약 12조8000억원)에 이른다.

미국 반도체지원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그래픽=정승아 디자이너

기업들이 한국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해외 진출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돈 보따리’를 풀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2021년 서명한 ‘인프라투자및일자리법(IIJA)’을 비롯해 지난해 시행된 ‘반도체칩과 과학법(반도체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까지 포함하면 미국의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비용은 총 2조달러(약 2600조원)에 이른다. 이 법안들은 미국 내 설비를 투자하고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에게 각종 보조금을 주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인도네시아, 태국 등 아시아 국가들도 파격적인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공장 투자 규모에 따라 최대 20년 동안 법인세를 100% 면제해주고, 이후 2년 동안에도 50%를 감면해준다. 태국도 50억밧(약 1900억원) 이상 규모 투자 시 법인세를 면제해준다.

반면 한국은 투자 이점이 여러모로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배터리의 경우 연구·개발(R&D)은 최대 50%, 시설투자는 기업 규모별로 15~25% 세액공제 등의 혜택을 받는 게 전부다. 지난 5월 발의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국가전략기술 투자 기업이 이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해당 세액공제분만큼 현금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으나 개정안은 아직 통과 전이다. “최소한 경쟁국과 동일한 수준의 인센티브는 제공해야 하지 않겠냐”는 게 업계의 요구 사안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우 좁은 시장과 부족한 자원 탓에 실질적인 인센티브 강화 전략이 필수적일 것이라고 제언했다. 국내 제조업에 대한 공동화 현상과 이에 따른 일자리 부족 우려도 나왔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최근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되면서 각 국가에서 배터리를 비롯해 반도체 등 첨단산업 전반을 유치하려는 게 하나의 흐름이 됐다”며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로 국내 산업 공동화 우려도 심각하다. 세제 혜택과 현금성 보조금 지급 등 틈새 없는 지원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산업 성장을 방해하는 ‘킬러규제’ 혁파도 숙제다. 최근 환경부는 ‘썩는 플라스틱’으로 불리는 생분해성 플라스틱이 그린 워싱(위장 환경주의)라며 환경표지 인증에서 빼버렸다. 이후 새 친환경 인증 방안을 내놓긴 했지만, 국내에는 관련 인증 설비가 없어 유명무실한 정책이 돼 버렸다는 평가다.

국내에서 고사 위기에 몰린 생분해 플라스틱업계도 해외로 눈을 돌렸다. LG화학은 ‘썩는 플라스틱’으로 불리는 생분해성 플라스틱 PLA 공장을 오는 2025년까지 미국 일리노이에 건설할 계획이다. SKC는 최근 열린 2분기 컨퍼런스콜에서 해외 공장 건설 계획을 밝히며 “한국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로컬 비즈니스가 아니고 글로벌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확장성 있는 국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