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미국내 3조 투자의 그늘

'트럼프 딜레마’에 글로벌 차업계 과잉투자 가능성…“시장점유율 정체 상태서 리스크 너무 커”

2017-01-18     박성의 기자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외쳐온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 이익주의)가 세계 자동차시장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미국 현지공장에서 만드는 차를 제외하고는 모두 높은 관세를 물게 하겠다는 트럼프 엄포 앞에 포드와 도요타, 피아트크라이슬러가 파격적인 미국 투자안을 발표했다.

여기에 남미시장 및 신흥국 투자에 몰두하던 현대차까지 5년간 총 31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신규투자를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미국 투자러시를 놓고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당장 신규 자동차수요가 창출되기 어려운 환경에서 생산설비만 늘린다면, 향후 자동차 생산 포화현상이 더 가중될 수 있다는 얘기다.

◇ 너도 나도 미국투자…현실은 ‘내리막’ 車수요

글로벌 자동차업계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높은 관세를 골자로 하는 무역 장벽, 이른바 트럼프노믹스를 공약으로 내걸은 탓이다. 수출로 먹고 사는 자동차사에게 고(高)관세는 악몽이다.

여기에 트럼프 당선인은 미국 내 일자리 창출을 늘려줄 수 있는 기업에겐 ‘당근’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각종 자동차 규제 해제와 법인세 삭감을 약속했다. 유럽 및 일본 자동차브랜드가 앞 다퉈 미국 현지공장 증설계획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포드자동차는 16억 달러 규모 멕시코 소형차 생산 공장 건립 계획을 철회했다. 대신 미국 미시간 주에 7억 달러를 들여 공장을 짓기로 했다.

도요타는 기존 멕시코 공장 설립 계획을 철회하는 대신 100억 달러를 미국 현지공장에 투자하기로 했다. 피아트크라이슬러(FCA)도 지난 8일 성명에서 2020년까지 총 10억 달러를 들여 미국 미시간주와 오하이오주 공장 설비를 현대화하고 2000명을 추가 고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말 한마디에 자동차사들이 투자 러시를 감행하고 있지만, 미국 자동차 시장 현실이 녹록치 못하다. 경기 불황 탓에 미국 자동차 수요가 차게 식었다. 미국 신규투자가 자칫 ‘가뭄 든 강에 그물만 잔뜩 쳐 놓은 꼴’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시장 분석 전문업체 BMI 리서치 조사결과에 따르면 2017년 미국 자동차 판매가 중고차 유입 증가와 대출 연체 증가로 올해 1.8%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자동차 시장의 수요 감소 탓에 지난해 GM과 포드 등이 대규모 감산과 공장 가동 중단, 해고 등의 비상 경영을 실시한 바 있다.

◇ 미국 자동차 부흥정책 실패 시 ‘투자 고스란히 빚’

현대차도 미국 투자행렬에 동참했다. 17일 정진행 현대차 사장은 외신기자들과 만나 앞으로 5년간 미국에 31억 달러(약 3조6000억원)를 투자하고, 신규 공장을 건설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및 제네시스 생산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차는 당장 올해 미국 자동차시장 전망이 좋지 않지만, 향후 트럼프 정부가 준비 중인 인프라 투자 및 세제 개편이 이뤄지면 2018년 이후 미국 자동차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른 글로벌 자동차업체의 미국시장 투자 이유 역시 이 같은 기대감이 배경이 됐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권순우 SK증권 연구원은 “현대차의 미국 투자가 이상하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에 대한 투자는 항상 있어 왔던 것”이라며 “단지 (항상 하던 투자에서) 조금 더 투자하는 것 뿐이다. 다른 자동차 업체 투자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고 밝혔다.

다만 현대차가 4조원에 육박하는 신규 투자안을 숙고를 거듭해 내놓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업계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신 힐러리가 백악관 주인이 됐다면, 현대차 미국 투자규모와 시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현대차의 미국시장 성장세가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할 만큼 크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현대·기아차 미국 시장 점유율은 2011년 8.9%를 기록한 이래 줄곧 내리막을 탔다. 2015년 반등에 성공한 후 지난해에는 전년보다 2.5% 늘어난 142만2603대를 판매했다. 같은 기간 미국 내수시장 점유율은 8.1%로 소폭 상승했지만 2011년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현대차 미국 투자는 경영상 투자라고 보이지 않는다. 현대차는 부정하고 있지만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친 기업정서를 이끌어 내기 위해 투자를 하는 걸로 보이는 게 사실”이라며 “당장 현대차 미국 내 마켓 점유율이나, 판매물량이 증가하고 있지 않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현대차가 생산 시설을 굳이 늘릴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일본 자동차사 한 관계자는 “자동차업계 모두가 트럼프 딜레마를 앓고 있다. 불경기에 조 단위 투자안을 모든 자동차사가 일제히 내놓는다면 향후 자동차 생산 포화현상을 부추길 수 있다”며 “현대차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의 내수 진작 효과가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한다면 투자는 고스란히 빚이 돼 돌아올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