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 누진제, 소득 재분배에도 역행
저소득가구일수록 되레 더 많은 전기요금 부담…에너지 절감에도 도움 못줘
올해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이 계속되면서 그 어느 해보다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이 뜨거웠다. 국민들의 원성에도 불구, 정부는 에너지 절약 및 소득재분배 등을 이유로 누진제 폐지를 일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진제가 당초 도입 취지인 에너지 절약 및 소득재분배 등에 실질적인 효과가 없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예상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 9일 공개한 ‘공공기관 요금체계 평가’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주택용 전기소비량 증가속도는 업무용, 산업용 등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선진국에 비해 주택용 전기 사용이 현저히 적을 뿐 아니라 전체 전력 사용량에 있어서도 주택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다는 것이다.
2005년 이후 주택용 전기는 매년 2.6%씩 사용량이 늘어난 반면 업무용 전기는 3.6%, 산업용 전기는 5.3%씩 증가했다. 이에 따라 2005년 전체 전기 사용량 가운데 주택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15.1%에서 2014년에는 13.1%로 줄었다. 반면 산업용은 50.2%에서 55.4%로 크게 늘어났다.
현재 주택용 전기요금의 누진구조는 월 100kWh단위로 6단계로 구분돼 있다. 한달에 100kWh 이하 사용전력량에 대해서는 60.7원/kWh인데 비해 500kWh를 초과하는 사용전력량에 대해서는 709.5원/kWh로 1단계 전력량요금의 11.7배 수준이다. 반면 일반용과 산업용에는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해 에너지절약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1974년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를 시행했다. 당시 누진 단계는 3단계, 누진율은 1.6배였다. 그후 1978년 2차 석유파동, 1990년대 고유가시대 도래 등을 이유로 누진제는 강화됐다 완화되기를 반복했다. 지난 2004년에 들어서야 지금과 같은 누진제로 결정됐다.
다른 국가들과 전력사용량을 비교해보면, 한국의 누진제 적용이 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산업용 전기는 1인당 5092kWh를 사용해 경제협력기구(OECD) 평균 2362kWh의 2.2배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주택용 전기의 경우에는 1인당 1274kWh를 사용해 OECD 평균 2341kWh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1인당 산업용 전기 사용은 OECD 6위, 주택용 전기는 OECD 22위였다.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이에 대해 “주택용 전력의 소비가 과도하게 억제되는 측면이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그동안 ‘블랙아웃’ 대비 등을 이유로 누진제 완화를 반대해 왔다. 블랙아웃은 대규모 정전(停電) 사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보통 특정 지역이 모두 정전된 경우를 일컫는다. 그러나 애초에 전체 전력사용량 중 주택용 전력 비중은 13~14%에 불과하다.
아울러 최대전력을 기록하는 오후시간대 전력사용량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일반용 전력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용 전력은 출근시간 즈음부터 사용량이 증가하기 시작해 오후 2~4시 즈음 최대치를 기록한 후 밤 10시 즈음부터 감소하기 시작한다. 반면 주택용 전력은 최대 전력을 기록하는 낮 시간대에는 오히려 전력 사용량이 감소하다가 퇴근시간인 오후 5시부터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결국 블랙아웃과 주택용 전력은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산정책처는 에너지 복지 측면에서도 누진제의 소득 재분배 효과가 크지 않다고 밝혔다. 전기 사용량과 요금이 소득보다는 가구원 수에 더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실제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득 5분위(고소득) 1인가구의 월평균 전기료는 4만 1800원인데 반해 1분위(저소득) 5인이상 가구의 전기요금은 5만 8100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똑같은 4인가구의 경우에도 1분위가 5만 4300원으로 상대적으로 소득이 많은 2분위(4만 5800원), 3분위(4만 6600원), 4분위(5만 1700원) 가구보다 더 많은 전기요금을 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저소득 가구가 난방을 전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런 조사결과는 결국 에너지 복지 측면에서 누진제의 효과에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는 가정용이 아니라 일반용 전기에 대한 관리가 필요하다”며 “한국의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는 과도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향후 누진제를 완화하는 방안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