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지프 랭글러, 미혹과 불혹 사이
불편함 상쇄하는 위압감과 하차감
지프 랭글러 루비콘은 베지마이트다. 조금 쉽게 취두부다. 우리 음식으론 청국장이다. 매력에 풍덩 빠지거나 아예 싫어한다. 지프 랭글러 언리미티드 루비콘을 타고 도심과 교외 150㎞ 가량을 달렸다. 미국 자동차의 맛이 진하게 났다.
랭글러를 경험한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외관, 내부 인테리어, 주행성능 등 랭글러가 가진 하나부터 열까지에 모두 사로잡힌 광신도가 한 그룹이다. 이들은 주로 랭글러 특유의 불편함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박수를 친다. 반대로 다른 그룹은 차량 구성 요소 하나하나에 팔짱을 끼고 냉소적인 비평을 내놓는다.
랭글러는 외관부터 내부, 각종 편의사항 전체가 오프로드를 위해서 태어난 차다. 2.8ℓ CRD 디젤 엔진이 내뿜는 최고 출력 200마력, 최대 토크 46.9kg·m가 이를 증명한다. 문짝부터 천정까지 모두 탈착이 가능하다.
미끈함은 없다. 공기저항계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각진 모양새는 리터당 9.2㎞에 불과한 연비가 당연하게 느껴진다. 경유차 대부분이 리터당 10㎞ 후반을 달리는 현 추세와 대조된다. 미국차답게 장치들은 거칠다. 버튼을 누르면 엔진이 켜지기는커녕 열쇠를 들고 나가야 주유구 캡을 열 수 있다.
운전석에 앉자 거친 장치들은 더욱 낯설게 다가왔다. 7월 햇볕이 달군 후끈한 공기를 빼고 싶은데 창을 내리는 버튼이 있어야할 자리에 없었다. 사이드미러를 조정하는 장치도 묘연했다. 센터페시아 상단에 달린 올인원 모니터는 3.5 플로피 디스켓을 구동 중인지 낮은 해상도를 가졌다. 가고 싶은 길은 안내해주지 않았다.
공조기로 손을 옮기자 수동 공조기 위로 차창 조절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공조기 버튼 옆에서 사이드 미러 조정 버튼도 다소곳했다. 지프 관계자는 “차량 섀시 골격만 빼고 차문과 천정을 모두 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달릴 생각은 없는 차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가속 페달에 발을 올렸다. 1톤 트럭에 짐을 싣고 기어노브를 2단에 고정한 뒤 클러치에서 발을 천천히 뗄 때 기분이 들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차체 크기에 비해 좁은 뒷좌석만 있고 짐은 없었다. 부드럽지 않은 무거운 출발이 있었다.
일반 도로의 가속 성능은 생각보다 좋았다. 5단 자동변속기에 더해진 구간별 사륜구동 방식은 안정적인 온로드 주행을 선사했다. 단단한 서스펜션과 묵직한 스티어링휠 조향감은 신뢰를 줬다. 다만 오프로드 주행 안전을 위해 바퀴 구동이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선 조향 보조 장치 움직임도 제한적인 탓에 좁은 공간 주차 시 핸들 조작이 어려웠다.
2m에 가까운 전고와 4.7m의 전장에서 풍기는 압도적인 위압감도 도로 위 주행 안전감을 더했다. 엔진 회전수를 높게 가져가 뚫린 도로에서 속도를 즐길 수 있게 하진 않지만 규정 속도에 맞게 천천히 느긋하게 달리는 멋이 있었다.
외부 소음이 적은 것도 장점이다. 탈착이 가능한 플라스틱 천정과 드러나 있는 도어 체결 부위 얇은 문의 두께에도 엔진음을 제외한 나머지 소리는 실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차문을 열어 젖힌 뒤에야 지면 위를 구르는 다른 차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랭글러의 멋은 이때 시작된다. 실내 재질 어디를 살펴봐도 우수한 마감이 느껴지지 않고, 키를 돌리면 수상한 딸깍거림도 들리지만 차에서 내리는 순간 이목은 집중된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하차감이라 명명했다. 내리는 순간의 기쁨, 이 차가 내차라는 자랑은 얽히고 설켜 다시 운전석에 오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