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건의 경제하이라이트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수주산업 회계투명성 제고’ 정책에 대해 관련업계가 글로벌 경쟁력을 내세우며 재고를 요구했다. 언론과 정치권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도산 직전 엉뚱한 몸부림을 치던 대우그룹이 떠올랐다.

당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많은 언론이 그에게 공감한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그가 언론인까지 대동하고 세계를 돌며 홍보에 치중하고 있을 때 대우그룹은 안으로부터 곪아터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우가 외환위기를 만나 1999년 도산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우그룹에 몸담았던 사람들조차 그룹의 불운이 외환위기나 정부의 지원 차단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몇 년 전부터 대우그룹은 과도한 부채에 휩싸여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룹 핵심기업들조차 이자를 갚으려고 새로 빚을 내는 실정이었다.

그 상황에서 자금을 돌리려다보니 기막힌 편법까지 동원했다. 현금이나 다름없는 금을 수입해 다시 수출하는 식으로 무역금융을 끌어 쓴 것은 그 중 하나다. 대우그룹 매출이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은 이면에 그런 숫자 부풀리기가 있었음은 나중에 금융당국 조사와 검찰 수사에서 확인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우그룹이 살아남을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룹 고위 관계자들은 잘못을 시정하기보다 덮기에 급급하며 기회를 날려버렸다. 저녁 신문에 나온 부정적 기사를 임직원이 나서서 빼내기도 했다. 간이 커진 회사는 수십조 원의 분식회계로 채권단과 정부를 속였고 수많은 투자자를 울렸다.

결국 그룹은 무너졌고 수많은 임직원이 실직했다. 거액의 감사수수료를 받고 분식결산을 눈감아준 산동회계법인은 간판을 내려야 했다.

모든 것 날린 회계조작

많은 아픔을 겪었기에 외환위기 뒤 회계 투명성 확보는 국가적 과제가 됐다. 회계기준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것도 그래서다. 그 결과 한국 회계정보는 상당히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개선됐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일부 기업에서 장부를 조작하는 못된 버릇이 되살아났다. 지난 해 4711억원 흑자를 냈던 대우조선해양은 올해 새 사장이 취임하자마자 상반기에만 3조원이 훨씬 넘는 영업손실을 냈다고 밝혀 시장을 뒤집어놓았다. 대우건설과 GS건설 등에서 시작된 건설업계 분식결산 파문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금 투자자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태수습에 실기할 경우 자칫 모든 기업이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위기를 감지한 감독당국은 분식회계 적발 시 회계법인 대표까지 처벌한다는 초강수 카드를 꺼냈다.  

그런데 업계는 ‘국가경쟁력 약화는 물론 국민경제에도 큰 타격’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탄원서를 냈다. 분식회계를 경영수단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조선이나 건설이나 해외 수주가 어려운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외국서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 한국 조선이나 건설업계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수주 부족 때문이 아니라 무분별한 과잉 저가수주에 있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건설업계는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라는 이름의 분식회계로 이미 국가적으로 많은 해를 끼쳤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건설·조선업계가 먼저 할 일은 무리한 수주가 아니라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다. 외형을 줄이더라도 내실을 다져야 하고 한 푼이라도 이익을 내야 한다.  

회계투명성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이다. 정보가 정확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익을 위해 편법을 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라. 정 기준 완화를 주장하려면 대우그룹 사례를 먼저 생각한 뒤 주장하라.

정진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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