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채 전 KT 회장이 배임죄 혐의 관련 1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자 재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임죄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기업인의 배임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관련 법 개정을 요구하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삼성 이건희, 현대차 정몽구, SK 최태원, 한화 김승연 회장 등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 다수가 배임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최태원 회장은 징역 4년 실형을 선고받고 특별사면 전까지 2년7개월 동안 수감생활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재계가 느끼는 배임죄에 대한 공포를 일부 짐작할 수 있다. 재계가 배임죄 개정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역설한 이유이기도 하다.

배임(背任)은 사전적으로 '주어진 임무를 저버리거나 임무의 본래 뜻에 어긋남'을 뜻한다. 배임죄는 형법 355조 2항에 다음과 같이 규정돼 있다.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해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는 5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그리고 이어진 356조에서는 '업무상 배임'에 대해 10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특별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 3조에서는 배임액에 따른 가중처벌 조항을 두고 있다. 배임액이 5억~50억원일 때는 3년 이상 유기징역을, 50억원 이상일 때는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으로 하한선을 규정했다.

재계는 배임죄 규정이 애매모호해 결과적으로 기업인의 경영 판단을 가로 막는다고 주장한다. 전경련 관계자는 "두루뭉술한 법조문을 좀 더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배임죄에 대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식”이라고 비판했다.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8월 전경련의 도움을 받아 배임죄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을 보면 재계의 속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개정안은 배임이 성립되기 위해선 목적성과 그에 따른 현실적 손해가 있어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추가했다. 기업인이 명확한 목적을 갖고 현실적 손해를 발생시킬 경우에만 처벌하자는 의도다.

정 의원은 개정안을 발의하며 "정상적인 경영활동까지 배임죄로 처벌해 기업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위축시킨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 주장과 달리 헌법재판소는 지난 2월 배임죄에 대해 재판관 8 대 1의 다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경영판단을 가로 막는다'는 청구인 신모씨 등의 주장에 대해 "대법원이 '경영상 판단' 법리를 수용했다"며 "업무상 배임의 고의성을 판단할 때 엄격한 해석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일축했다. 법조항이 불명확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대법원이 손해와 이득액의 개념을 엄격히 해석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피해액에 따른 가중처벌'에 대해서도 입법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박범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정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개정안은 단순히 판례를 법조문에 넣는 차원이 아니다"며 "기업인 다수를 배임죄에서 빠져나가게 만들어 줄 법"이라고 비판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대법원 판례가 있지만, 법원의 판단이 일관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명확하게 단서조항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승연 회장 대법원 판결을 예로 들며 "목적성이 없었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업무상 배임죄는 목적의 유무와 상관없이 성립할 수 있다.  서울 지역 한 판사는 “김 회장 사건에서 배임죄는 다툼의 소지가 없었던 것으로 안다. 다만 그룹을 살리려고 한 취지였다는 점이 인정돼 집행유예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등이 배임죄를 비판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는 높은 무죄율이다. 실제 지난 1일 이한성 새누리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특경가법상 배임죄와 일반 배임죄의 무죄율은 각각 11.6%와 5.1%였다. 이는 일반범죄 무죄율 1.2%에 비해 현격히 높은 수준이다.

이 의원은 "검찰이 무리하게 배임죄를 적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창원지검장을 역임한 검사 출신이다. 그가 친정인 검찰의 수사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전경련 관계자도 "검찰이 기업 관련 수사만 하면 배임죄로 찔러보는 것 같다"고 불만을 표했다.

야당과 법조계 인사들도 검찰 수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여당과 재계 측 주장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정권 차원의 사정수사에서 검찰이 기업인을 배임죄로 무리하게 엮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권 교체 후 반복되는 공공기관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사퇴 압박성 수사를 예로 들었다.

이렇듯 검찰 수사의 문제점에 대해선 여러 집단이 공유한다. 그러나 검찰의 잘못된 수사로 발생한 문제점을 법조문에서 찾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하면 재판을 거쳐 무죄로 판결난다. 배임죄 사건의 무죄율이 높다는 것이 그 증거이지 않겠는가.   

배임죄에겐 죄가 없다. 우리 기업들은 소수 지분을 가진 총수 일가가 사실상 모든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후진적인 경영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배임죄 규정이 완화된다면 경영진의 전횡을 막을 최소한의 장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김현웅 법무부장관도 지난달 10일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배임죄에 대해 "회사 경영자의 부정을 방지하고 소액주주를 보호하는 측면도 있다"며 개정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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