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최근 한국의 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격상시켰다. 한국은 앞서 무디스와 피치로부터 Aa3와 AA- 등급을 받은 바 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모두로부터 이런 등급을 받기는 처음이다. 게다가 지금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은 일본의 등급보다도 높다.

여기까지는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정부가 이번 등급 조정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며 자만하는 듯 보인 점은 매우 우려된다.

정부는 이번 등급 관련 설명 자료에서 “세계 경제 둔화 속에서도 양호한 대외건전성을 바탕으로 성장세를 유지하면서 성장잠재력 확충을 위한 구조개혁을 꾸준하게 추진한 성과”라고 자평했다. 또 “순 정부부채도 올해 기준으로 GDP의 20%를 소폭 웃도는 등 양호한 수준”이라고 했다.

이런 대목에서 정부가 당면한 부채 문제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부채 축소에 나서야 할 국민들을 호도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그게 새로운 재앙을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 1997년 S&P로부터 이번과 같은 AA- 등급을 받고 불과 두 달 뒤 쓰라린 외환위기를 맞은 경험이 있다.

정부는 부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자칫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이 이자 갚기 위해 빚을 낼 만큼 재정이 어려워진 것도 부채의 위험을 간과한 관료들의 오판에서 비롯됐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얘기다.

한국 정부가 잘못 판단하고 국민을 호도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지방정부나 공기업 부채를 국가부채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신용평가사를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당국 스스로는 물론이고 국민의 눈을 흐리는 마약이나 다름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하물며 거대기업의 부채나 과도한 가계부채까지 종종 국가부채로 돌변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미국 정부가 모기지 회사 패니매와 프레디맥에 2000억 달러나 되는 천문학적 구제금융을 퍼부어 국유화한 것은 아직도 생생하다. 2009년엔 파산한 GM에 600억 달러를 투입해 역시 국유화했다.

국내에선 외환위기 후 도산한 대우그룹과 여러 은행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한 적이 있다. 이 자금의 상당부분이 이후 국가부채로 바뀌었다.

이 때 혼이 난 정부는 이후 은행에 대해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손실까지 반영해 자산을 판단하라는 FLC라는 이름의 자산건전성분류기준을 도입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아직도 분식회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특정 지자체가 도산하고 거대 공기업이 부도를 내도 내버려둘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국가부채 규모가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고 수치가 시시각각 늘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권은 그걸 공격의 빌미로 삼기도 한다. 오제세 의원은 최근 기재위 국감에서 “국가채무와 공공기관 부채만 합쳐도 GDP의 70.7%에 달한다"며 "박근혜 정부는 재정파탄 정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야권 또한 국가부채 규모나 분식결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현 야권이 집권했던 2002년 말 당시 정부가 외국 투자자에게 내놓은 국가부채는 88조원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국가채무가 참여정부 말인 2007년엔 299조원으로 급증했다. 그것도 공공기관 부채나 연기금 차입금 등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국가부채가 단기간에 급증한 것은 그 동안 이처럼 다른 이름으로 분장하거나 다른 영역에서 숨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제 중앙정부 부채 뿐 아니라 지방정부와 공기업, 지방공기업, 산하기관 부채를 모두 도마에 올려놔야 한다. 기왕이면 연기금 과부족도 함께 말이다. 한계에 달한 대기업 구조조정도 더 늦춰선 곤란하다. 초저금리 국면에서도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금리 상승기에 국가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빚에 의존해 꾸려가는 가계에 대해서도 현실을 직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특히 무책임한 대출을 지속하는 금융기관을 통제해야 한다.

신용등급이 어떻게 되었건 부채는 시급히 관리해야 할 국가적 과제가 됐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 곪은 곳들이 터진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부채 관리의 첫 단계는 진실한 정보공개다. 정책이 힘을 받으려면 국민의 지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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