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잡는 베테랑

영화 ‘베테랑’이 파죽지세다. 1300만 관객 동원을 목전에 두고 있다. 작품성 측면에서 얼마나 잘 만든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극장에 사람들이 몰리는 게 작품성이 뛰어나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꽉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주인공들의 활극에 매료된 것 같다.

주제는 빤하다. 특수 강력사건 담당 형사가 재벌 3세를 때려잡는 진부한 얘기다. 주인공 서도철(황정민)은 세상에 뵈는 게 없는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의 “건들면 다친다”는 느글느글한 핀잔에 주눅 들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격한다. 뒷돈 부스러기 챙기며 돈 많고 힘 있는 분들 ‘개’ 노릇하는 공권력에 익숙한 우리로선 별종 ‘형사님’이다.

우리 사회를 풍자하는 대사가 압권이다. 남자들 술자리에서 흔히 쓰는 말인데 영화에서 들으니 온 몸으로 느낌이 온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어제 저녁에도 비애를 안주로 씹으며 쓰디 쓴 소주잔을 털어 넣던 친구가 내뱉은 말 아닌가.

재벌 3세 조태오의 말씀은 또 어떤가.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된다.” 그렇다. 죄가 있고 없고는 따질 일이 아니다. 형사고 검사고 판사고 문제 삼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고상한 말 들먹일 이유도 없지 않은가. 다 아는 얘기인데.  

‘베테랑’ 전에도 맨주먹으로 돈과 권력을 깨부수는 열혈남아가 있었다. 김홍신의 소설 ‘인간시장’ 주인공 장총찬이다. 이름도 ‘긴 총을 찬 사나이’에서 따왔다고 한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런 1980년대 초 혜성처럼 나타난 장총찬은 우리의 영웅이었다. 권력자든 재벌이든 그에게 걸리면 여지없이 묵사발이 됐다. 암울했던 시절 사람들은 장총찬의 종횡무진을 보며 시름을 달랬다. ‘베테랑’의 서도철은 장총찬의 분신이 아닐까 싶다.

시대를 뛰어넘어 서도철과 장총찬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자를 싫어한다. 이들을 흠씬 두들겨 패면 박수치며 좋아한다. 미국에선 부자가 존경받는데 한국에선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다. 왜 그런지는 말 안해도 다 안다.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가도 금방 나오고, 동네 빵집 망하게 하고, 세금 떼먹고, 군대 안가고 등등. 이들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일등공신이면서도 욕은 욕대로 얻어먹는 게 현실이다. 조태오 같은 이들이 설치는 한 서도철, 장총찬은 대를 이어 나타날 것이다.

여의도에선 재벌총수들을 국정감사에 부르는 걸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야당은 부르자 하고, 여당은 감싸기 바쁘다. 잘못했으면 당연히 나와 해명이든 변명이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정감사 때 재벌 총수들이 나와서 또렷한 얘기를 한 기억이 없다. 마지못해 “잘못했다”고 고개 한번 숙이고 떠나면 그걸로 끝이다. 의원님들 호통은 카메라를 의식한 퍼포먼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재벌 총수가 국감에 나와 봐야 소득이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야당은 악착같이 불러내려 한다. 그럴싸하게 추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국민이 재벌을 싫어한다는 걸 이용해 점수를 올리려는 심산이다. 암흑가 보스처럼 베일 뒤에 있던 재벌 총수에게 삿대질 하며 으스대는 거다. 유권자들은 야무지다며 표를 좀 줄지 모르겠다.

정치인의 포퓰리즘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게 그들의 업이니까. 다만 재벌 총수들에겐 할 말이 있다. 존경받지는 못할지언정 욕먹을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여름에 수재의연금 100억 내고, 겨울에 자선냄비에 100억 담은들 ‘나쁜 이미지’가 바뀔 리 없다. 평소 잘해야 하는 거다.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게 뭔지 크게 보라는 거다. 그러면 ‘베테랑’ ‘인간시장’이 베스트셀러가 되진 않을 것이다. 세상이 좀 나아지는 거다. 그런 세상을 보고 싶은 게 국민의 심정이다.

그나저나 코뚜레에 꿰인 듯 국감장에 끌려나오는 재벌 총수 모시는 대관업무 담당자들 요즘 엄청 바쁘겠다.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주군이 창피를 당하면 당장 잘릴 터이니 의원님이나 보좌관 구슬리려 진땀 꽤나 흘리겠다. 돈이든 인맥이든 총 동원령이 내려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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