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교수

학창 시절 수재로 서울대 산업미술학과에 입학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만 22세 나이로 최연소 자동차 디자이너가 됐다. 캘리포니아 디자인 연구소를 거쳐 2004년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박사과정에 입학, 2007년 자동차 디자인아이덴티티에 대한 논문으로 서울대학교 공업디자인 1호 박사학위를 받은 남자.

구상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교수 이야기다.

최연소,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엘리트 디자이너이자 교수지만 그가 풀어낸 자동차 이야기는 화려함보다 순수함이 어울렸다. 꿈을 이뤘지만 아직도 꿈을 꾸는 ‘자동차 쟁이’ 구 교수를 국민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났다.

◇ 자동차 그리고 15만원...구상 첫 번째 꿈을 이루다

구상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교수/ 사진 = 박성의 기자

어린시절 별명은 유치하다. 그리고 유치한 별명엔 주인공 특색이 묻는다. 구 교수 별명도 마찬가지였다. 자동차 그리기를 좋아했던 구 교수 별명은 ‘차상’. 그는 어릴 적부터 자동차가 좋았다.

이유는 없었다. 단지 남들보다 자세히 차를 살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동그라미 두 개와 직사각형으로 차를 그릴 때, 구 교수는 자동차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자연스럽게 구 교수 진로는 미술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됐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문제가 생겼다. 미대에 입학하기 위해선 미술학원을 다녀야 했다. 당시 구 교수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다. 공무원 박봉에 미술학원 비용을 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미술학원 원비가 한달 15만원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 월급은 60만원이었다. 그런데 고3이 되니 학원비가 25만원으로 오르더라. 가족에 부담이 될까봐 학원 원장을 찾아갔다. 청소라도 하겠으니 15만원으로 다니게 해달라 부탁했다. 꿈 앞에 자존심은 문제가 안 됐다”

구 교수의 간절함이 통했다. 원장은 15만원으로 원비를 깎아줬다. 대신 조건이 붙었다. 남들보다 열심히 해서 국내 최고 대학에 붙으라는 것. 구 교수는 누구보다 열심히 그렸고 배웠다.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 빛을 발했다. 1985년 겨울 구 교수는 서울대 산업미술학과에 합격한다.

◇ 인테리어 그리고 캘리포니아...구상 두 번째 꿈을 이루다

 

1980년대만 해도 국내 자동차업계 전망은 어두웠다. 자동차는 외산 브랜드를 따라갈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디자인학도가 돈을 벌기 위해선 자동차가 아니라 건축 디자인을 하는 게 빨랐다. 동기들은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럴수록 자동차 디자인을 향한 구 교수의 간절함은 커졌다.

“당시 서울대 선배 중 자동차 회사에 진학한 사람은 손에 꼽았다. 자동차는 출세 길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애초 자동차가 좋아 입학한 과였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옳다 믿었다”

결국 그는 꿈을 이룬다. 1988년 기아 자동차 디자이너 공채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 구 교수 나이는 만 22살, 최연소 합격이었다. 그 뒤 구 교수는 프라이드 팝, 프레지오, 크레도스 등을 디자인한다.

“처음 입사하자 익스테리어(외관 디자인)가 아닌 인테리어 작업을 주더라. 처음엔 실망스러웠다. 프레지오 인테리어 디자인은 2년 반동안 혼자 해내야 했다. 시트 종류만 25가지를 디자인했다. 나중에는 인테리어도 재밌더라. 설계자와 소통하며 운전자가 직접 몸에 닿는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큰 보람이었다.”

구 교수가 내·외관 디자인 모두에서 재능을 보이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기아자동차 미국 디자인연구소로 발령 받게 된다. 당시 미국 연구소는 한국보다 연봉이 3배 이상 높았다. 연구소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기후는 최고였다. 구 교수는 ‘지상 낙원’에서 기아차 슈마 디자인 등에 참여하며 재능을 만개한다.

◇ ‘Museum 66’...구상 세 번째 꿈을 그리다

 

구상 교수 연구실에는 수집 중인 자동차 모형이 가득하다 / 사진 = 박성의 기자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을 다니던 중 또 다른 길이 열렸다. 새로 개교하는 대학교에서 자동차 디자이너 후학을 양성해달란 제의가 들어왔다.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구 교수는 10년 가까이 다닌 회사에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1997년 대구가톨릭대학교 공과대학 자동차 디자인주임교수가 된다.

디자이너에서 교수가 됐지만 자동차를 향한 구 교수의 열정은 그대로다. 하는 일이 바뀌었을 뿐 자동차에 대한 애정은 더 깊어졌다.

“현직에 있다 보면 양산이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디자인을 해야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그려내는 디자인에는 그런 틀과 한계가 없다. 그래서 매년 새 학생들에게 영감을 받는 지금이 더 행복할 때도 있다.”

구 교수 연구실은 다른 교수 방과 다르다. 자동차 장난감 가게같다. 수 많은 자동차 모형이 빼곡하다. 이 모형 하나하나가 구 교수 마지막 꿈의 퍼즐조각이다.

“마지막 꿈이 있다면 자동차 박물관을 만드는 거다. 자동차는 어른들 장난감이다. 마음껏 즐길 공간이 필요하다. 넓은 교외에 RC카 경주장과 프라모델 스프레이 부스를 갖춘 박물관을 짓고 싶다. 지금 그 곳을 채울 자동차 모형을 수집 중이다. 지금 1200대 정도 모았다. 15년 뒤 3000대를 채우면 ‘Museum 66’라는 이름으로 개관하겠다”

박물관 이름에 붙는 ‘66’ 숫자의 의미는 구 교수가 태어난 년도다. 동시에 미국에서 가장 긴 국도 번호기도 하다. 평생을 자동차와 함께 하고자 하는 구 교수. 꿈을 말하는 구 교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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