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 적용 대상 사업장 88개 중 DNA DB 수령기업 15개
“방통위 기술 가이드라인·DB 제공 지연 탓”

그래픽 = 김은실 디자이너
그래픽 = 김은실 디자이너

[시사저널e=김용수 기자] 오는 12월 ‘n번방 방지법’ 시행을 앞두고 기본이 되는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불법촬영물 필터링기술과 DNA DB 제공조차 받지 못한 곳이 다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 업계는 필터링 테스트 기간만 3개월이 걸릴 것으로 전망해 사실상 연내 법 시행은 물 건너갔다는 평가가 나왔다. 시행이 늦어진 데는 방통위의 ‘늦장대응’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방통위는 ‘차질없는 시행’을 자신한다.

20일 인터넷업계에 따르면 불법 동영상을 선별할 기본 자료인 DNA DB 등을 제공받은 인터넷업체는 대상 88개중 15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 적용 대상 사업자들은 서버 구축과 관련 기술 검증에 시간이 걸려 법 적용 유예 및 계도기간이 필요하단 입장이다. 방통위가 실제 서비스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관련 기술 가이드라인 및 DNA DB 등을 지나치게 늦게 제공한 탓에 의무 이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전혜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n번방 방지법' 준비 현황 / 자료 = 전혜숙 의원실
방송통신위원회가 전혜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n번방 방지법' 준비 현황 / 자료 = 전혜숙 의원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전혜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방통위로부터 제출받은 ‘n번방 방지법 관련 기업에 대한 적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18일 기준 ‘정부기관(ETRI) 개발 필터링기술 모듈 및 불법촬영물 특징정보(DNA) DB’ 이용 신청 기업과 ‘사업자 자체 필터링기술에 따른 DNA DB’ 신청 기업은 각각 13곳과 2곳에 불과했다.

오는 12월 10일부터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리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의 ‘기술적·관리적 조치’가 의무 적용될 예정이지만 88개 적용 대상 사업자 중 DNA DB를 내려받은 사업자가 15곳에 불과한 것이다.

DNA DB 신청 기업수가 적은 배경으로 IT업계 및 방통위는 필터링 및 DNA DB 서버에 각각 활용할 장비 수급이 어려운 점을 꼽았다. 방통위에 따르면 사업자들은 ‘CUDA 지원 GPU’ 장비를 구축해야 한다. 방통위가 이와 관련된 기술 가이드라인을 지난 8월 사업자들에게 공지했지만 장비 가격이 최소 수천만원대일뿐만 아니라 반도체 수급 차질로 장비 확보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상혁 방통위 위원장은 지난 5일 국정감사에서 “해당 조치는 12월 시행될 것이며 DNA DB 협조 등 현재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기술적 조치를 진행 중”이라며 “결과로 보여주겠다”고 자신했지만 방통위는 해당 사업자들의 필터링서버 구축 완료 여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정부, 사업자 기술 조치 지원 미흡···장비 수급·기술 검증 시간 고려 없이 일방 추진

앞서 국회는 지난해 5월 ‘n번방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n번방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방통위는 지난해 7월 웹하드사업자와 일정 규모 이상(일평균 이용자 10만명 이상 또는 연평균 매출액 10억원 이상)의 부가통신사업자를 ‘사전 조치 의무 사업자’로 지정하고, 이들에게 불법 촬영물 유통 방지를 위한 기술적·관리적 조치를 의무화했다.

이에 따라 사전 조치 의무 사업자는 정부로부터 필터링기술을 받아 필터링서버 및 DNA DB 추출 서버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개설한 '디지털성범죄등 공공 DNA DB 기술지원포털'을 통해 DNA DB를 받아 API를 연동해 DNA DB 서버도 구축해야 한다.

다만 방통위는 사업자들이 불법 촬영물 필터링조치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필터링기술과 영상의 특징정보인 DNA DB를 구축해 제공하겠다고 밝히며 지난해 말 법 의무 적용 시기를 1년 늦췄다. 이에 따라 오는 12월 10일부터 불법 촬영물 유통을 막지 못한 사업자들에 대해선 시정명령 및 과태료 처분이 내려진다. 법 적용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음에도 방통위의 필터링기술 및 DNA DB 제공이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n번방 방지법 관련 사전 조치 의무 적용 사업자 / 자료 = 전혜숙 의원실
n번방 방지법 관련 사전 조치 의무 적용 사업자 / 자료 = 전혜숙 의원실

전 의원이 방통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사전 조치 의무 사업자는 네이버, 카카오, 구글코리아, 페이스북, SK커뮤니케이션즈, 줌인터넷 등 대형 사업자부터 문피아, 스푼라디오, 루리웹닷컴, 디시인사이드, 뽐뿌커뮤니케이션 등 중소형 사업자까지 총 88개다. 현재 정부기관의 성능평가를 받고 있는 국내 필터링 전문업체의 필터링서버를 이용할 36개 웹하드사업자를 포함해도 나머지 37개 사업자는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의 기술적·관리적 지원이 미흡한 상황에서 관련 기술을 검증하는 데만 최소 3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다 보니 법 적용을 앞둔 사업자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인터넷업계 관계자는 “방통위가 사업자들이 준비할 시간을 안 주고 9월이 돼서야 DNA DB값을 제공하는 등 너무 촉박하게 진행하고 있다”며 “특히 반도체 수급 문제로 방통위 기술가이드라인에서 권장사양으로 나와 있는 장비를 준비하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보인다. 또 관련 기술을 검증하는 것도 최소 3개월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두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 DNA DB를 내려받은 회사도 절반에 그치는 것 아니냐. 방통위가 현재 사업자들의 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음에도 본인들의 역할을 사업자들에게 떠넘긴 결과다”며 “필터링기술 및 DNA DB를 신청한 사업자들조차 12월까지 준비하기는 어렵다고 한다”고 강조했다.

◇ 사업자들 “법 적용 유예·계도기간 필요”···방통위, 사업자 우려 사실상 묵살

사업자들의 이같은 문제제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방통위는 사업자들의 우려사항을 수차례 전달받았음에도 사실상 업계의 우려사항을 묵살해왔다.

대표적으로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지난 7월 27일 방통위에 기술적·관리적 조치 의무 적용과 관련 업계 우려사항이 담긴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2개월간 회신이 없어 국민신문고를 통해 같은 내용의 민원을 제기했지만 방통위는 답변 기한을 넘겨 지난 19일에서야 서면 답변을 냈다.

ETRI가 개발해 제공한 기술은 실제 서비스 환경이 아닌 이용자 불편을 포함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방통위는 답변서에서 “설치가이드에 예시된 처리 기간을 측정한 실험에선 실제 서비스에서 발생될 수 있는 이용자 및 콘텐츠 수 등의 서비스 특성을 모두 반영하기 어렵다”며 “서비스 형태와 특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각 서비스에 적합한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어 안정적인 서버 운영을 위해 몇 대의 GPU 장비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선 “각 사업자의 서비스 형태(업로드, 스트리밍 등)와 특징(빈도, 개수, 용량 등)에 따라 달라지므로 몇 대가 필요하다고 답변하기 어렵다”며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또 필터링기술 및 DNA DB 제공 지연 등 귀책 사유가 정부에게 있어 사업자들이 기술적·관리적 조치 적용을 완료하지 못할 경우 적용유예가 필요하다는 우려에 대해선 “법령의 시행시점이 12월 10일로 적용유예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여기에 방통위는 최근 업계 관계자들과 진행한 회의에서도 예정대로 법 시행하겠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방통위가 실제 서비스 현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실상 기업에 대한 규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필터링기술 및 DNA DB 제공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렇다 보니 사업자들 사이에선 법 적용 유예 및 계도기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방통위가 실제 서비스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관련 기술 가이드라인 및 DNA DB 등을 지나치게 늦게 제공한 탓에 기술적·관리적 조치 의무 이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IT업계 관계자는 “방통위가 사업자들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거듭 힘들다고 의견을 전달한 기술 적용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아닌가 싶다”며 “법 취지는 좋지만 실현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계도기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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