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항일운동 나서···고국에서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 힘써
막대한 재산 모두 독립자금에 사용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윤현진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윤현진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윤현진(尹顯振)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으로서 임정의 살림살이와 혁신을 위해 노력했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항일운동에 나섰고, 고국에서는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에 힘썼다. 막대한 재산을 모두 독립자금으로 사용하며 자신과 가족은 어려움을 감수했다. 독립에 온 노력을 다 바치다 2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조부 홍석은 동래 출신 만석꾼이었다. 조부는 막대한 토지를 유산으로 남겨 네 명의 아들 모두 부자가 됐다. 선생의 큰형이었던 윤현태는 이후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주주로 활동했다.

선생은 15세 되던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구포 사립학교 설립취지서를 보면 교명을 구명(龜明)이라 해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백산 안희제(安熙濟)는 1909년 구명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구명학교는 민족의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다.

선생은 1908년 엄정자와 결혼해 아들과 딸들을 낳았다. 선생은 17세였던 1909년 중국으로 가 상하이와 베이징을 둘러보며 외국의 저명한 정치가와 여러 독립지사들과 만났다. 이를 통해 체계적인 근대학문의 필요성을 느낀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일본에서 항일운동 하다···“조선동포 위해 결사 활동”

선생은 22세가 되던 1914년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딩시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많은 학생들은 일본에서 유학생 단체들을 만들었다. 1913년 각 유학생 단체들의 협의체 조직인 조선유학생학우회가 결성된다.

윤현진 선생 등 반제국주의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학생들은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했다. 선생은 신아동맹당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선생은 1915년 봄 김철수(金錣洙), 장덕수, 정노식, 김철수(金喆壽), 전익지(全翼之) 등과 함께 동경 인근의 다마천(多摩川)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돌려 마시는 열지동맹(裂指同盟)을 맺었다. 당시 열지동맹원들은 앞으로 상하이, 싱가포르,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흩어져 상호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결의했다.

선생은 1916년 열지동맹원들과 조선인 유학생 최익준, 하상연, 김명식(金明植), 김양수(金良洙), 중국인 유학생 황췌, 뤄훠(羅豁), 덩시민(鄧潔民), 셰푸아(謝扶雅), 대만인 유학생 펑화룽(彭華榮) 등과 함께 “아세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세아를 세우자”는 목적으로 비밀결사 신아동맹당을 조직했다. 신아동맹당은 일본제국주의 타도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같은 처지로 제국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인도와 베트남 출신 재일유학생들을 가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신아동맹당은 집회연설, 각종 단체조직, 모금 및 반일 서적배포 등의 활동을 했다.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집회와 연설 등으로 민족해방을 선전하고 대중의 열망을 모았다.

1916년 6월 11일 선생은 김효석과 함께 메이지대학 졸업생회에서 ‘장래 조선동포를 위해 결사적으로 활동할 것’, ‘임관(任官)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선생과 같은 고향 출신의 김철수(金喆壽)는 1918년 4월 3일 일본으로 유학을 오게 된 학생 환영회에서 “자유평등과 조선의 발달, 조선민족의 품성향상을 진전하고 있는데 경찰에 매수된 비열한 이 있다면 역사 있는 국민인 우리들은 그들을 박멸해야한다”고 말했다.

선생이 적극 활동했던 신아동맹당은 중국인 유학생과 힘을 합쳐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일본으로 밀반입해 유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선생은 1916년 유학생활 2년 만에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내서 항일 비밀결사·교육운동 앞장서

귀국한 선생은 3년 동안 양산, 부산, 구포 등에서 다양한 항일운동을 했다. 선생은 경제적 활동과 함께 비밀결사운동, 교육운동 등을 했다

당시 울산의 부호로서 경남일보를 설립하고 초기 상해 임시정부에 많은 자금을 지원했던 김홍조(金弘祚)는 선생과 많은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울산에서 부산으로 갈 때는 일부러 양산에서 선생을 만났다. 뜻있는 많은 이들이 선생의 집을 방문하거나 선생의 집에서 장기간 체류했다. 이는 선생의 평소 인품과 교유관계를 보여준다.

선생이 관여했던 비밀결사단체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은 1909년 10월 보성중학교 교장이었던 박중화(朴重華)를 비롯해 김두봉, 안희제(安熙濟), 신백우, 이경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선생 등 대동청년단에 참가한 영남지역 인사들은 백산상회나 조선국권회복단에 속한 상인, 지주, 계몽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중소지주, 부농, 부상(富商) 출신으로 신교육, 신사상, 신지식을 수용해 국권회복운동과 자강운동에 앞장섰다.

대동청년단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국외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윤현진 선생과 남형우, 최완 등은 상해 임시정부, 곽재기는 의열단, 김동삼은 만주, 백광흠은 조선공산당 등에서 각각 활동했다.

또 선생은 서상일, 이호연, 윤병호, 이수영, 윤상태, 최완, 이우식 등과 함께 백산상회에 관여했다. 선생은 백산 안희제와 항일운동에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막대한 비밀자금을 제공한 백산 안희제의 백산무역주식회사에 선생과 선생의 큰형 윤현태가 대주주였다. 또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실질적으로 주관했던 재무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에 재정적으로 많은 지원을 했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백산 안희제가 1916년 개인 경영으로 출발했다. 1917년 10월 경기호황으로 합자회사로 전환했다.

이후 백산상회는 1919년 공칭자본금 100만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성장했다. 당시 조선인이 설립한 회사 가운대 자본금 100만원 이상의 회사는 제조업에서 경성방직주식회사, 상업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와 동양물산주식회사 뿐이었다.

선생은 큰형과 함께 1919년 11월 백산 안희제가 중심이 돼 부산 및 인근지역 유지들이 우수한 청년들을 국외로 유학시킬 목적으로 설립했던 기미(己未)육영회의 발기인으로도 참가했다.

기미육영회에서 유학을 보낸 대표적 인물로는 해방 이후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국문학자 이극로(李克魯), 초대 국방부장관을 지낸 신성모(申性模) 등이 있다.

◇상해 임시정부 살림과 혁신에 힘쓰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맡고 있었던 선생은 3월 21일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선생은 독립임시사무소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독립임시사무소는 상해 임시정부 탄생에 중요 역할을 한 동제사(同濟社)와 신한청년당 주축으로 결성됐다.

선생은 1919년 4월 13일 발표된 상해 임시정부 7개 위원회 중 신익희 이외 8명과 함께 내무위원으로 선정됐다. 이후 선생은 9월 18일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각 도를 대표하는 도별위원 중 경상도위원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1920년 1월 김구, 손정도(孫貞道), 김철(金澈) 등과 함께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했다. 의용단은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의용단의 국내 활동지로서 평양, 황해도, 부산 등이 일제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선생은 1920년 2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기 위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주식을 모집할 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 이미지=보훈처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 이미지=보훈처

선생은 1919년 9월 11일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재무차장으로 선임돼 1921년 2월 22일까지 임정의 살림살이를 맡았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는 분열과 이승만의 대통령 호칭 사용문제, 1919년 11월 여운형의 도일(渡日)문제, 이승만 퇴진문제 등의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선생을 중심으로 1920년 5월 14일 차장과 비서장이 연맹해 대통령불신임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총사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제시한 이승만 대통령직 퇴진에 대해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을 맡았던 도산 안창호는 회의적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퇴진시킬 경우 친미외교에 손실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퇴진시킨다고 해도 이승만 본인이 임시정부의 결정사항을 무시할 경우 현실적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에 선생은 “혁명 사업은 우선 내부가 서로 신임하고 응결하여야 되는바 현금 상황으로는 진행할 수 없으니 이박사가 퇴거하거나 우리가 퇴거하거나 양단간 해결”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맞섰다. 이들은 국무원 연석회의에서 이승만 중심의 구미위원부를 해산할 것을 포함한 4개항의 요구조건을 재차 제시했다.

안창호는 만약 차장들이 주장하는 대로 된다면 상해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분열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그 대안으로 ‘차장내각책임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선생과 내무차장 이규홍(李圭洪)은 안창호가 제시한 ‘차장내각책임제’를 채택하게 된다면 마치 차장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을 도모한 것으로 내비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거절했다.

결국 선생과 차장들은 1920년 6월 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불신임안과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안창호의 설득과 주변의 만류로 사직서는 취소되고 5개월 동안 끌어온 상해 임시정부 개혁 논의는 중단됐다.

선생이 요구했던 상해 임시정부의 혁신 노력은 1921년 2월 박은식, 원세훈, 왕삼덕 등 14인이 ‘우리동포에게 고함’을 통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국민대표대회는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15일까지 63회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으나 끝내 개조파와 창조파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 결과 이후의 국외 독립운동은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이 각계 약진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당시 선생은 개조파의 수장인 안창호가 중심이 돼 결성한 국민대표대회 상해기성회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1921년 9월 15일 국민대표대회 상해기성회가 주최했던 상하이와 베이징의 대표자 연석회의에서 여운형, 김규식과 함께 상해기성회 대표로 참석해 상해 임시정부의 개조에 앞장섰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선생은 과로가 겹쳐 1921년 9월 17일 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선생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했다. 외국에서 어머님에게 편지를 보내 건강을 염려했다.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 고국에 남은 부인 엄정자(嚴貞子) 여사와 아들 동건(東健)은 ‘반일인사의 가족’으로 온갖 박해를 받았다. 일제는 선생의 집에 배급을 주지 않았으며 손자 석재의 경우 중학교 입학도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부호의 집안에서 태어나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독립자금으로 사용했기에 본인과 가족들은 어려운 삶을 살았다. 부인과 자식들은 쑥을 캐러 다니고 콩깍지를 삶아 먹으며 어려운 생활고를 겪었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17년 12월 양산시는 선생의 흉상을 새롭게 제작해 춘추공원 내에 제막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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