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공기·순간의 감각…라이브 공연의 ‘유일성’

주변에서 덕(덕후) 중 제일은 ‘뮤덕(뮤지컬 덕후)’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온 바 있다. 기본적으로 10대 때부터 아이돌 팬을 경험한 필자는 주변에서 N차(동일한 뮤지컬을 본 횟수)의 공연을 보는 뮤지컬 팬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같은 공연을 10회도 아니고 20회, 30회 심지어 40차 넘게까지 볼 수 있는지, 당시에는 경제적으로나, 체력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소모성 덕질이 아닌가, 반문했던 것 같다. 

몇몇 친구들은 최애 배우가 겹치기 출연을 하는 경우 소극장이 쉬는 날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거의 대학로에 살다시피 했는데, 필자는 매시간 돌아오는 티켓팅 날짜에 용병(티켓팅을 도와주는 메이트)을 뛰곤 했다. 

필자는 절대적으로 그 경험을 평생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돌과 크로스오버, 그리고 마지막 종착역인 소극장 뮤지컬 공연까지 필자 인생 최고의 덕질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 문 앞에서 손짓한 필자의 첫 회전작은 바로 5월 3일 마지막 공연을 진행한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난해하고 함축적이라 소극장에, 그것도 뮤지컬로 올린다는 것이 무리지 않을까라고 보기 전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아버지를 죽였을까?’, ‘의지’ 혹은 ‘행동’의 기로에 선 4명의 형제와 아버지의 삶이 110분 정도로 축약돼 필자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이 관극은 한번으로 끝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들이 동일한 연기를 지속하지 않고, 이 극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다시금 내뱉어 폭풍을 일으키는 순간을 작은 극장 안에서 (그것도 코앞에서) 목도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희열이었다.

심지어 뮤지컬은 한 번에 하나의 캐스팅이 아니라 더블, 트리플 캐스팅으로 3개월 가량을 지속하기 때문에 필자의 최애 배우가 여러명의 페어와 함께 하는 걸 볼 수 있고, 페어마다 느낌이 각각 달라 그 순간의 연기 변화를 라이브로 경험할 수 있다. 순간적인 애드립과 리액션, 그리고 그날의 감정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연기는 그날이 아니고서야 절대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순간은 두 번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니 한회차도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뮤지컬 산업은 어느 순간부터 재관람문화를 정착해나가기 시작했는데, 재관람을 통한 할인이나 특전 등은 이 산업이 하나의 관객이 얼마나 더 많은 공연을 볼 것인가에 방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 또한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를 15회차째 보고 있고, 이 극에서 애정하는 배우 중 하나가 ‘알렉산더’라는 공연을 하고 있는데다, 또 다른 애배우들이 다음 공연인 ‘풍월주’, ‘전설의 리틀농구단’ 출연을 예정한 상태라 일하는 날을 제외하곤 대학로의 회전문에 갇혀있게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의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중화되고, 무관객 상영이 지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라이브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거라고 믿게 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절대 미디어로는 매개될 수 없는 그 분위기, 공기, 그리고 변화하는 순간에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감각. 그것이 공연의 ‘유일성’이 가진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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