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이끌어 독립만세운동 기획하고 집행···탄압에도 두 번째 만세운동 나서
한국인에 불리한 소운송업 통합정책 반대에 힘써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김원벽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김원벽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김원벽(金元璧) 선생은 3.1운동의 학생 선봉장이었다.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학생 대표로 서울에서 두 번의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다. 동포들의 뒤가 아닌 앞에 서 있었던 지식인었다. 선생은 만세시위를 기획하고 집행했다. 이 일로 탄압 받았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째 만세운동의 앞에 나섰다. 한국인에 피해를 입히는 조선총독부의 소운송업 통합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힘썼다.

김원벽 선생은 1894년 5월 20일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태석은 장로교 목사였다.

‘경신사’에 따르면 김원벽은 1901년 은율군 이도면 소재의 숭실학원을 거쳐 평양의 대성학교를 다녔다. 1911년 가을 명신학교를 떠나 서울의 경신학교로 전학가 그곳에서 졸업했다. 동기생 가운데 이병주는 훗날 김원벽과 함께 연희전문학교의 3·1운동을 이끌었다.

김원벽 선생은 경신학교 졸업 후 1914년 4월부터 12월까지 사립보광학교(普光學校)의 교사를 지냈다. 이후1915년 4월 설립된 한국기독교대학에 입학했다. 한국기독교대학은 개교 후 교명을 조선기독교대학으로 바줬다. 이후 조선기독교대학은 연희전문학교로 이름을 다시 바꿨다.

김원벽과 윤치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윤치호는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으로 불리는 105인사건으로 체포됐다. 일제의 조작이었음에도 징역살이를 하다가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풀려났다. 1917년 중앙기독교청년회 총회에서 김원벽 선생은 보고서에 서기를 쓰는 게 기독교의 상례인데 총무 윤치호가 일본 천황의 연호인 다이쇼(大正)를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특사 이후 현실을 인정하고 총독부와 대립을 삼가던 윤치호에 대한 청년 지도자들의 문제 제기였다.

◇ 3·1만세운동 앞장서다···탄압에도 또 만세운동 나서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침탈을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김원벽 선생과 노준탁은 윌슨 대통령이 정의와 인도를 바탕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쓰고 그 결과 조선에 자유와 평등의 공화제가 다가올 것으로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였다. 국제 정세에 밝은 지식인들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국의 안창호, 중국의 여운형, 일본 유학생 현상윤과 서춘 등이 그랬다. 특히 안창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 승인을 요구하자는 견해를 단호하게 비판했다. 다만 민족자결주의가 정의와 인도라는 새로운 보편적 국제질서의 원리로 확산되던 상황만은 인정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하려는 신한청년당 등 여러 활동들이 그러했다.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일본 유학생의 독립운동을 고무시켰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도쿄유학생 400여 명은 조선YMCA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또한 2·8 독립선언은 국내의 독립운동을 자극했다.

1919년 1월 말 김원벽 선생은 박희도의 주선으로 경성 시내 각 전문학교의 학생 대표들을 관수동의 중국요리점 대관원에서 만났다. 강기덕(보성전문), 이공후(전수학교), 김형기(경성의전), 주종의(경성공전), 한위건(경성의전) 등과 주익, 윤화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주익과 박희도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는 만큼 독립운동 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제안했다. 김원벽은 2월 3, 4일경 강기덕과 김형기를 만난 뒤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로 확실하게 결심했다.

2월 12일과 14일 김원벽, 김형기, 윤자영, 김문진, 배동석, 한위건 등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들이 다시 모여 해외 독립운동 정세를 논하고 독립사상을 북돋웠다. 김원벽은 학생대표로서 강기덕과 만나서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협의했다. 이에 2월 20일 승동교회에서 제1회 학생간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경성전수학교 대표 전성득과 윤자영,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와 한위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김문진과 이용설,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과 한창환,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등이 참여했다.

김원벽은 기독교계의 박희도와 독립운동 시위를 준비했다. 선생은 강기덕, 한위건과 함께 각 중등학교의 학생 대표자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김원벽은 경신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담당했다. 강기덕은 서북친목회와 중앙학교, 선린상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을 만나 독립의식을 일깨웠다.

3월 1일 오후 두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하고 독립선언서가 인쇄됐다. 2월 28일 밤 각 전문학교의 대표와 중등학교 대표가 만나 독립선언서를 나누고 배포 장소를 학교별로 정했다. 비밀 엄수를 당부했다.

마침내 3월 1일이 왔다. 정오가 지나자 시내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을 포함한 수만의 군중이 탑골공원에 모였다. 손병희 등 33인은 급히 장소를 바꿔 인근의 태화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결국 두시 반쯤 탑골공원에서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에 나섰다.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경찰과 헌병의 탄압으로 해산됐다. 그러나 학생들 중심으로 두 번째 시위를 준비했다.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독립만세운동을 했다. 김원벽과 강기덕이 시위를 이끌었다. 경찰은 주모자 김원벽을 잡으려고 폭력을 휘둘렀다. 김원벽은 이때 쇄골이 부러졌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김원벽에게 보안법 제7조를 적용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류가 누려야 할 권리다

김원벽은 1921년 11월 4일 공덕동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했다. 흰 옥양목 두루마기를 입은 김원벽 선생은 “옥중에서 고초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만기돼 출옥하니까 그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1922년 1월 9일 김원벽은 잡지 ‘신생활’의 이사로 참여했다. ‘신생활’ 창간호는 1922년 3월 11일 발행 예정이었다. 신생활사는 3월 8일 창간호를 납본했는데 조선총독부는 치안방해를 이유로 창간호의 발매를 금지했다. 신생활사는 어쩔 수 없이 문제된 기사를 삭제해서 임시호를 발행했다. 제4호(4월 11일)는 압수됐다. 제6호(6월 1일)도 발매금지 돼 임시호로 나왔다. 일제는 특히 러시아혁명기념 특집호로 발행한 제11호와 제12호를 크게 문제 삼았다. 12월 22일 검사국은 발매금지와 함께 사장 박희도, 주필 김명식, 기자 신일용과 유진희를 신문지법과 1919년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으로 기소했다. 결국 ‘신생활’은 1923년 1월 8일자로 폐간 처분을 받았다.

신생활사는 취지서에서 자유와 평등의 신생활을 강조했다. 개조와 혁신의 시대에 모든 인류가 누려야 할 권리이지만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은 자유와 평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회는 개조를 필요로 하는데 사회의 개조는 인간의 개조를, 인간의 개조는 생활의 개조를 필요로 한다는 논리였다. 이 생활의 개조가 신생활이었고 이는 평민문화의 건설과 자유사상의 고취를 통해서 이룰 수 있었다.

‘신생활’ 폐간 이후 최남선이 새롭게 창간한 시대일보에 참여했다. 그러나 최남선이 창간 두 달 만에 신문 발행권을 보천교에 넘기는 계약을 맺으면서 논란이 확대되는 와중 김원벽은 시대일보를 떠났다. 보천교는 당시 사회를 어지럽힌 종교로 여겨졌다.

◇ 한국인에 불리한 일제의 소운송업 통합정책 반대하다

1927년 1월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승인운송점 개정규칙초안’을 발표했다. 한 역에서 취급하는 화물 수량 아울러 납입금의 50% 이상을 점유하는 업소를 승인 운송점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나의 철도역에 하나의 화물 운송점만 두고 이 역 모두를 중앙에서 관리하도록 만드는 정책이었다. 이렇게 될 경우 자본금이 많은 운송점이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인 운송점은 일본인보다 자본과 경영방식이 상대적으로 열악했기에 조선인 운송점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이에 조선인 운송점들의 조직체인 선운동우회가 철도국의 이 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선운동우회는 대안으로 일역이점주의를 제시했다. 한 역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운송점을 하나씩 두자는 것이었다. 김원벽은 1927년 7월 선운동우회 횡단합동 실행위원 및 교섭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1928년 선운동우회에서 상무이사로 활동하던 김원벽은 발진티푸스로 치료를 받던 중 4월 9일 오후 여섯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김원벽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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