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100년과 독립운동가] 일제의 한국인 학살 현장 취재한 장덕준
  • 이준영 기자(lovehope@sisajournal-e.com)
  • 승인 2020.04.0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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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일본군에 학살 진상 추궁 후 행방불명···암살 확실”
미국 의원단 만나 일제 불법행위 알리고 '한국 독립' 호소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는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장덕준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장덕준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장덕준(張德俊) 선생은 간도에서 일제의 한국인 학살 현장 취재에 나섰다가 일본인들에 의해 행방불명됐다. 한국 역사의 첫 순직기자다. 선생은 미국 의원단이 중국을 방문하자 특파원으로 취재하고 일제의 불법 행위를 알렸다. 동아일보를 창간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선생은 1892년 6월 25일에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07년 재령읍 기독교소학교에 입학해 1909년 졸업했다. 1914년 평양일일신문사에 취직해 조선문 신문부 주간으로 일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신문이었지만 선생은 기자로 활동하면서 평양의 명사들인 조만식(曹晩植), 김동완(金東完), 이덕환(李德煥) 등과 교류했다. 선생은 이 곳을 1년 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선생은 1915년 일본에서 대학 진학 예비과정인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에 다녔다. 1917년 동경 조선기독청년회 간부로 임명돼 활동했다. 선생은 노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7년 1월 23일 창립된 노동동지회 회장을 맡았다.

◇ 동아일보 창간···일제 민족말살정책 비판

이후 선생은 국내로 돌아와 김성수와 함께 ‘육영회(育英會)’ 설립을 추진했다. 1920년 3월 8일자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과에서 작성한 보고에 따르면 육영회의 목적은 인재양성을 통한 조선 문화 촉진이었다. 이에 조선 학생 중 품행이 단정하고 학력이 우수한 자를 선발해 외국으로 유학시키고자 했다. 육영회 결성은 이루어지진 못했다.

이후 선생은 김성수와 뜻을 모아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장덕준 선생은 창간 다음날인 1920년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을 10차례 썼다. 선생은 이 논설에서 이 논설에서 일본인 교수 등이 제기한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一視同仁論) 그리고 3·1독립운동을 왜곡 보도한 일본여론 등을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5일자부터 6월 16일자까지 5차례에 걸쳐 황해도 재령·해주, 평안도 평양·진남포·강서·선천·의주·신의주 등지를 순회한 르포를 ‘삼민생(三民生)’ 취재로 싣는다. 기자가 이 지방을 돌아보니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조선인을 차별하고 학대하고 멸시하며 일본인 위주의 행정으로 일관하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다.

국가보훈처는 “조사부장 장덕준이 1920년 6월 4일부터 5일간 해주에 머문다는 기사로 미뤄 ‘삼민생’이 장덕준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미국 의원단 취재하러 중국행···하원 외교위원장에 일제 불법행위 폭로

당시 동아일보는 외신으로 들어온 미국의원단의 동아시아 방문을 주시했다. 이에 1920년 여름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 의원단 취재를 위해 장덕준을 중국으로 보냈다.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 일행 100명(하원 44명, 상원 6명 및 그 가족들)으로 구성된 미국의원단은 이해 7월 초 미국을 떠나 8월 5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들은 철도편으로 중국대륙을 거쳐 조선에 들어오려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들 일행을 통해 독립을 위한 국제 여론을 형성할 기회로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임정은 ‘미국의원시찰단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안창호가 준비위원장을 맡아 6월 28일 환영 및 외교 예산 1만1400원을 준비했다.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기독교와 천도교 주도로 ‘독립원조청원서’를 제출하고 시위운동 등을 하려고 계획했다.

장덕준 선생은 7월말 베이징으로 떠났다. 공식적인 출장목적은 중국의 정세 취재였다. 

미국 의원단 일행 150명 중 50명은 베이징에 8월 14일 도착했다. 임시정부는 이들에게 한국문제에 대한 진정서를 전달하려고 노력했으나 상하이에서는 이것이 여의치 않았다.

선생은 베이징에서 미 의원단을 취재할 때 상하이에서 온 안창호의 도움을 받았다. 안창호는 8월 16일 여운형, 황진남, 장덕준과 함께 미 하원 외교위원장 포터를 만나러 갔다.

포터는 ‘자신의 방문이 공식이 아니고 사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국 일에 극히 찬조할 것이나 이것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답’이라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헌법과 일본인의 불법행위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면서 한국 상황에 관심을 표명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는 이에 대해 “국내와 상해를 연락하던 사람 중 당시 동아일보사의 장덕준이 있었는데 그는 통신원을 가장하고 북경에 머무르면서 국내와 국외를 연결했다”며 “북경에서 여운형·황진남과 함께 시찰단을 방문해 영문으로 만든 한국 헌법, 한·일관계, 일본인의 여러 불법 행위라는 책자를 제공하며 일본의 한국 통치 실황을 설명하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장덕준은 8월 18일 미 의원단장 스몰을 인터뷰하고 ‘서울에 도착하게 되면 한국 사람의 환영회에도 출석해 주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8월 24일자 3면에 크게 보도했다. 1면에는 논설주간 장덕수의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노라’는 논설을 싣고, 이 논설을 영문으로도 게재했다.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스몰은 장덕준에게 “이번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일부러 우리 일행을 만나기 위하여 이곳 베이징까지 온 안창호 씨도 우리는 매우 반갑게 만나보았습니다”라고 전했다. 미국 의원단 일행이 베이징을 떠나 만주를 경유해 서울로 오는 중간 기착지인 펑톈(奉天)부터의 취재는 김동성(金東成) 특파원이 맡았다.

의원단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는 8월 24일 밤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의원단이 숙소로 정한 조선호텔로 가는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군중들은 운집해 있다가 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 경찰은 권총을 발사하고 100여명을 붙잡았다.

의원단은 미국으로 돌아가면 자신들이 보고 들은 조선 민중의 행동을 무심히 넘길 수 없을 것이며 적지 않은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동아일보 일제 악정 지적으로 무기정간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의 ‘대영(大英)과 인도(印度)’ 논설을 문제 삼아 신문 간행을 무기한 중지시켰다. 이 글은 20세기 인도에서 영국이 저지른 악정을 논하면서 이를 조선과 일본에 대비했다.

동아일보의 정간은 해를 넘겨 1921년 1월 10일에 해제됐으나 즉시 속간하지 못하고 40일 후인 2월 21일부터 다시 발행을 시작했다. 이 정간 기간 중 장덕준 선생은 일본군에 피살돼 한국 최초의 순직 기자가 됐다.

◇일제의 조선인 학살 사건 취재 중 행방불명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동시에 정간 중이던 이 무렵, 만주의 훈춘(琿瑃)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000명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 사건이었다.

장덕준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현지로 달려갔다. 취재를 한다 해도 정간 중인 동아일보에 보도할 지면도 없었으며, 폐병에 걸려 피를 토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선생은 홀로 죽음의 땅으로 갔다.

장덕준 선생은 간도의 현장에 도착해 “빨간 피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냈다. 이어 “살풍경이 일어나 공포의 기운이 가득한 간도 일대에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남녀노소가 살육의 난”을 당하고 있는 광경 등 일제의 만행을 취재했다.

그러던 선생은 어느 날 일본인 두세 명에 불리어 나간 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선생은 우리 언론사상 첫 순직 기자가 됐다. 당시 나이 29세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정간 중이어서 취재를 해도 보도할 지면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장덕준 선생은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로 일본군이 장덕준 선생을 암살했음이 확실하다고 보도했다.

“…장덕준이 이에 대해 참아 견디지 못하고 적의 군대에 들어가 적의 상관을 보고 그러한 불인도(不人道)한 행위를 힐책(詰責)하자 적측(일본군)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면 한번 함께 가서 보자하고 약속하기에 무심히 여관에 돌아와서 잠이 들었는데, 밤중이 돼 일본군이 와서 말하기를 상관이 부르니 같이 가자고 하기에 장덕준은 의심이 들어 밤중이니 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해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됐다. 일본군은 장덕준을 미워하고 기피해 그날 밤 밖으로 유인해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

동아일보는 장덕준이 실종된 지 10년이 지난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殉職者)로서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 추도식에 참석했던 김동진(金東進)은 장덕준에 대해 “의에 대한 용기, 봉공의 정신, 이 두 가지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끼친데 대해서 나는 과거의 모든 의인보다도 별달리 사모코저 하는 것이다”고 했다.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 ‘기자협회 기장(記章)’을 제정하면서 메달의 뒷면에 장덕준 기자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기자협회 기장은 사실보도 그 자체보다는 기자로서의 용기와 사명감을 더 높이 평가하기로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장덕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준영 기자
정책사회부
이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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