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고의·과실’ 성립요건으로 한 현행법 합헌 결정
긴급조치 근거로 기소·판결 했으나 공무원 과실은 아냐
다수의견 “입법자가 별도 입법 통해 구제할 수 있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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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이 성립돼야 한다는 현행법은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국가배상법 해당 조항은 1970년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긴급조치’를 바탕으로 이뤄진 강압적인 수사나 재판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 할 수 없다는 판례의 근거가 되면서 논란이 돼 왔다.

헌재는 과거에 행해진 법 집행행위로 사후에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경우, 행정혼란 등 국가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못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헌재는 국가가 더 폭넓은 배상을 할 필요가 있다면, 국가배상법이 아니라 별도의 입법을 통해 구제하면 된다고 봤다.

헌재는 26일 긴급조치 1호와 9호로 수사와 재판을 받은 피해자 등이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이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을 재판관 5(합헌):3(위헌)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선고했다.

이 사건 조항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공무원 등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힐 경우 법에 따라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청구인들은 긴급조치로 인한 수사·재판 과정에서의 불법 행위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대법원에서 2014년 10월 법관의 불법행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기각되자 헌법소원을 냈다.

우리 법원은 긴급조치가 2013년 위헌결정이 났지만, 긴급조치에 의해 공소를 제기한 수사기관의 직무행위나 긴급조치를 적용해 유죄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헌재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이 없는데도 국가배상을 인정할 경우 피해자 구제가 확대되기도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원활한 공무수행이 저하될 수 있다”며 “국가배상청구권의 성립요건으로서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규정한 것을 두고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긴급조치는 집행 당시 그 위헌 여부를 유효하게 다툴 수 없었다”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201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위헌으로 선언된 만큼, 다른 일반 법률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과는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과거에 행해진 법 집행행위로 인해 사후에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면, 국가가 법 집행행위 자체를 꺼리는 등 소극적 행정으로 일관하거나, 행정의 혼란을 초래해 국가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며 “심판대상조항이 헌법상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선례는 여전히 타당하고, 이 사건에서 선례를 변경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헌재는 나아가 긴급조치로 인한 배상이 필요하다면 별도의 입법을 하면 된다고 명시했다. 헌재는 “국가의 행위로 인한 모든 손해가 이 조항으로 구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긴급조치 제1호 또는 제9호로 인한 손해의 특수성과 구제 필요성 등을 고려할 때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 여부를 떠나 국가가 더욱 폭넓은 배상을 할 필요가 있다면,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입법자가 별도의 입법을 통해 구제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김기영·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은 “국가배상청구권 관련 법률조항이 지나치게 불합리해 국가배상청구를 곤란하게 만들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면, 이는 헌법에 위반된다”고 반대 의견을 냈다.

이어 “개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요구한 결과, 불법성이 더 큰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오히려 국가배상청구가 어려워졌고,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피해를 외면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며 “이는 국가배상제도의 본래 취지인 손해의 공평한 분담과 사회공동체의 배분적 정의 실현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긴급조치는 1972년 개헌된 유신헌법 제53조에 근거해 대통령이 발령했던 특별조치로 모두 9차례 공포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통해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었다. 1974년 이후 긴급조치 1·3·4·9호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람만 589개 사건에 1140명에 이른다. 긴급조치는 1980년 유신헌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됐다.

대법원은 지난 2015년 긴급조치는 불법행위가 아니어서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대법원은 2014년에도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임이 선언되기 전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것은 국가의 불법행위는 아니고, 고문 등 수사기관의 구체적 위법행위가 있어야 국가에 배상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했다. 이 두 판결은 박정희 정권이 발령한 긴급조치에 면죄부를 준 판결이라는 논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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