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제소 후 1년여 ‘잠잠’···양자협의 요청하며 갑작스런 제소절차
주력 선종·거래처 상이···“현대重-대우조선 빅딜 방해 목적 가능성 커”

/그래픽=조현경 디자이너
/ 그래픽=조현경 디자이너

일본이 세계무역기구(WTO)에 한국과의 양자협의를 요청했다. 양자협의란 WTO 분쟁해결 절차의 첫 단계다. 사실상 제소와 관련된 본격적인 절차를 밟게 됐음을 의미한다. 앞서 일본은 2018년 11월 한국의 조선업 구조조정 대책이 WTO 보조금 협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제소했다. 

3일 관계당국과 전문가들, 그리고 업계 안팎 등에서는 지난해 일본이 감행했던 경제보복의 연장선에서 이를 해석하는 분위기다. 지난해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항의하는 성격의 보복 조치를 취한 바 있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했고, 스마트폰·반도체 등 한국의 핵심 사업군 소재산업에 대해 강력한 무역제재 조치를 단행한 바 있다.

이후 부품 수급에 비상이 걸린 한국 기업들은 속속 자급화에 성공했다. 오히려 한국이 주 거래처였던 일본 소재업체들의 판로가 가로막히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더불어 한국 내에서는 강력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한국 관광객들을 주 수입원으로 삼던 일부 지자체의 타격이 커졌다. 이 때문인지 지난해 하반기부터 보복 조치들이 속속 완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본의 WTO 제소는 지난해 경제보복에 앞서 별도로 제기됐던 사안”이라며 “당시 한국은 일본의 제소에 대해 반박하며 입장차를 보였고, 이후 일본이 별다른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시기 등 종합적으로 ‘왜 지금’ 제소 절차를 본격화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일본 측 주장에 근거가 빈약하다”고 지적하며,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업계에서도 비슷한 반응들이 나왔다. 한국 조선업이 일본을 넘어선 지 오래 된 만큼, 서로의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이유에서다. 경제보복의 연장 성격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양국은 주력 선종이 다르다. 한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중국이 급부상한 후부터 일본은 벌크선 등 중소형 선박 위주로 바뀌었다. 컨테이너선 등도 제작하고 있지만, 한국에 비해 규모가 작다. 한국도 일본이 취급하는 선박들을 건조하는 상황이지만, 고부가가치 선박들에 집중하는 양상이다. 대표적인 것이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이다.

LNG추진선 등 각종 신기술 개발 및 접목에서도 일본에 비해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취급하는 주력 선종이 다르다 보니 자연히 고객층도 상이하다. 한국은 유럽·중동 등 글로벌 선사들을 주 고객으로 두고 있다. 반면 일본은 내수 중심이다. 영국의 해운조선 전문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은 전체 발주량의 72.3%를 자국 선사들에 의존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본의 이번 행보 이면에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란 추론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간 합병 승인 심사에 ‘반대’ 명분을 만들기 위한 선제작업의 일환이 아니겠느냐는 지적이다. 두 회사의 합병 승인 심사는 일본을 비롯해 한국·중국·유럽연합(EU)·싱가포르·카자흐스탄 등으로부터 모두 승인을 얻어내야 가능하다.

현재까지 카자흐스탄만이 승인 결정을 내린 가운데 주요국들의 심사가 이어지고 있다. EU와 싱가포르가 우려를 표시한 가운데 2단계 심층조사에 들어간 상태다. 이날 현대중공업은 WTO 양자협의 요청 주체(국토교통성)와 기업결합심사 주체(공정취인위원회)가 상이함을 지적하며 “WTO 제소는 기업결합심사와 무관한 일이며, 심사는 현지 독점금지법에 근거해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다른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두 사안이 별건임은 분명하다”면서도 “일반적인 두 절차의 진행 속도 등을 감안했을 때 기업결합심사가 WTO 제소 절차보다 앞서 종료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일본은 두 회사의 결합으로 인해 입게 되는 피해를 입증하기가 상당히 곤란한 처지이다 보니, WTO 제소를 통해 명분을 만들고자 했을 수 있다”면서 빅딜을 제한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했다.

신동원 인하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일본은 194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반 세기 남짓 글로벌 조선시장에서 세계 최강 지위를 누려 왔지만, 한국에 추격을 넘어 역전을 허용한 뒤로 관련 학과가 1~2개 수준에 그칠 정도로 관련 산업 전반이 위축돼 엔지니어링의 맥이 끊길 처지”라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이미 기술적 격차가 벌어진 상태에서 한국에 거대 조선소가 탄생한다면, 규모의 경제에서 밀려 자국 내 수주도 장담하지 못할 상황으로 접어들 수 있다”면서 “단순히 WTO 제소보다 한국 조선업의 확장을 방해하기 위한 수순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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