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위협 무릅쓰고 직접 무기 들고 일경·밀정 처단···30세에 순국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미지=조현경 디자이너
이미지=조현경 시사저널e 디자이너

홍학순(洪學淳) 선생은 치열하게 항일 무장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1904년 8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15세에 고향에서 목격한 의주 3․1운동이 선생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의주 3․1운동은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이나 지속됐다. 선생의 고향인 주내면에서는 3월 28일 압록강 연안의 섬 방적도에서 60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3.1운동을 했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의주군 3․1운동의 시위 횟수는 모두 38회, 참가 연인원은 6만여명, 사망자 31명, 부상자 350명, 피체자 1385명에 달했다. 매우 치열하게 전개됐다.

선생은 3․1운동 이후 중국 요녕성(遼寧省) 관전현(寬甸縣) 안평하(安平河)로 이주했다.

◇ 통의부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본격 뛰어들다

홍학순 선생은 만 20세인 1924년 2월 남만주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통의부(통의부)에 가입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선생은 1927년 7월 정의부 제5중대장 김석하(金錫河)의 지시를 받고 이진무(李振武)·김봉수(金奉秀)·김치복(金致福)·이원진(李元珍)·장기천(張基千) 등과 함께 국내에 진입해 평북 구성군 조악(造岳) 주재소를 습격했다. 일경 오모다메(重爲好)를 사살했다.

같은 해 7월 부하 3명을 데리고 의주 읍내 금융조합을 습격해 900여원을 군자금으로 가져갔다.

이어 8월 21일 동지 장기천과 김봉수 등에게 식산은행(殖産銀行) 의주지점을 습격하도록 했다. 같은 시간 선생은 ‘용만(龍灣) 금융조합’을 습격해 군자금으로 983원을 가져갔다.

당시 이 날은 용만 지역의 장날이었다. 그곳에는 한국인, 중국인과 일본인, 러시아인 등 수 천 명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홍학순 선생은 시장의 군중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조국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이후 선생은 1928년 9월 1일 정의부 2중대원 이원과 함께 요녕성 토성자(土城子)에 거주하는 일제의 밀정 최상진(崔相鎭)을 사살했다.

◇ 압록강 하류 국경에서 대담한 무장투쟁 전개

1929년 4월에서 9월 사이 남만주의 정의부(正義府)·참의부와 북만주의 신민부(新民府) 등의 일정한 통합조직으로 길림(吉林)에서 국민부(國民府)가 만들어졌다. 선생은 이 조직 산하 독립군인 조선혁명군 대원으로 참여했다.

선생은 1929년 9월 9일 김관덕(金寬德)·정봉화(鄭鳳和) 등과 함께 평북 삭주군 구곡면(九曲面) 신안동(新安洞)에 있는 신연금산사무소(新延金山事務所)를 습격하고 거액을 금을 빼앗아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의 활동자금으로 사용했다. 당시 그곳의 광산은 일제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었다.

선생은 그 후 이진무가 주도하는 소규모 독립운동 조직인 ‘조선인독립군’ 부대에서 활동했다. 선생은 동지들과 평안도 북부지방에서 약 4400원의 군자금을 모집했다. 또한 일본 경찰과 4차례의 격전을 치르며 일경 5명을 사살하는 등 모두 25회 전투를 벌였다.

특히 평북의 삭주와 용천 일대에서 일경 20여명과 두 차례에 걸쳐 3~4시간 동안이나 전투를 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은 매우 대담한 무장투쟁을 전개해 많은 한국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선생은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해 압록강 하류 일대의 국경지방을 출몰하며 눈부신 활약을 했다”고 밝혔다.

1931년경 선생은 남만주 지역과 평안북도 일대 국경지방을 넘나들면서 조선총독부 경찰관과 6차례 교전했다. 특히 평북 삭주와 구성 등에 있는 금광과 부호를 습격해 군자금을 모으고 경관 다수를 처단했다.

◇ 혹독한 일제 고문에도 동료를 보호하다

일제는 홍학순 선생의 치열한 항일 무장투쟁을 막기 위해 특수공작을 추진했다.

선생이 체포된 결정적 계기는 악질적 친일 밀정인 김삼산(金三山) 때문이었다. 이에 결국 선생과 이진무·이병표(李秉彪)·윤하운·한성걸(韓聖杰)·이월로(李月老)·김태묵·이동훈(李東勳)·안국형·박인홍 등 조선혁명군 대원 10여 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일경에 잡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남만주 신빈·관전현 일대의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본부 및 주요 조직, 참가자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은 이들 조직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일제의 취조 과정에서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이들 조직과 자신들은 전혀 성격과 행태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남만주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조선혁명당 산하의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조직과 참가자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선생과 이진무 등 동지들은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 일제의 편파적 재판으로 30세에 사형, 순국하다

1933년 3월 6일 오후 홍학순 선생은 이진무 등 동지 8명과 함께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일본인 판사들의 심리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재판에는 검사 다니다(谷田)가 입회했고 와다나베(渡邊)와 츠카모토(塚本) 판사가 배석했다. 기쿠치(菊池) 재판장이 주심을 담당하는 등 모두 일본인 판·검사가 주도했다. 처음부터 재판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선생은 같은 해 6월 26일 이진무와 함께 사형을 받았다. 평안도 등 국경지방에서 여러 차례 일경과 전투를 벌여 다수의 경관을 살상하고 일제의 ‘치안’을 위반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일제 당국의 이 같은 판결에 불복해 선생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복심법원에 항소했다. 그러나 2심 재판관도 모두 일본인이었다.

복심공판이 진행되던 도중 선생의 동지인 이진무와 김태묵은 공소를 취하하고 1심에서 받은 형량을 그대로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이진무는 자신의 행동을 구차하게 변명할 필요가 없고, 또 죽음은 이미 각오한 것이니 1심 판결대로 사형을 받겠다고 선언해 일본인 판사들과 한국인 최 변호사를 놀라게 했다. 김태묵 역시 이진무와 마찬가지로 공소를 취하하고 그대로 징역 12년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선생도 이들처럼 공소를 취하하고자 했으나 이미 심리(審理)가 진행중이어서 방법이 없었다. 결국 2심에서도 선생은 일본인 재판장에 의해 사형을 받았다.

홍학순 선생은 1934년 5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동지 이진무와 함께 일제의 사형집행으로 순국했다. 당시 선생의 나이 30세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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