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 작성 및 지원 중단 ‘유죄’, 명단 전달 및 현황 보고 ‘무죄’
직권남용죄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 의미 구체적으로 판시
‘국정농단’ ‘사법농단’ ‘청와대 선거개입’ 등 굵직한 사건 영향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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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사건을 파기환송한 배경에는 직권남용죄를 엄격하게 해석한 판단이 주효했다. 대법원은 김 전 실장 등의 범죄 행위를 세분화해 각 행위별 직권남용죄 성립 여부를 살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실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일부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그동안 직권남용죄의 해석을 놓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돼 온 상황에서, 이날 전합은 범죄성립요건인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전합은 먼저 김 전 실장 등이 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 등 소속 직원들로 하여금 각종 정부 지원 사업에 배제하도록 한 혐의가 직권을 남용한 것에는 해당한다고 봤다. 그러나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먼저 전합은 ▲예술위원장·예술위원에게 배제지시를 전달하는 행위 ▲지원배제 방침이 관철 될 때까지 사업진행 절차를 중단하는 행위 ▲지원배제 대상에게 불리한 사정을 부각시켜 심의위원에게 전달한 행위 ▲지원배제 방침을 심의위원에게 전달한 행위 ▲지원배제 업무에 용이하도록 심의위원을 구성하는 행위 ▲배제대상자를 안건에서 제외해 심의위원에게 전달한 행위 ▲위원회 전체회의 심사를 보류한 행위 ▲지원배제를 위한 명분을 발굴한 행위 ▲지원배제를 위해 새로운 기준을 발굴하고 이를 적용하기 위해 사업을 재공고한 행위 ▲심의위원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행위 ▲지시에 따라 지원금 삭감 의안을 상정하는 행위 ▲상영불가 통보 행위 등을 한 행위 전부가 문체부 공무원들에게 형법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라고 결론 내렸다.

반면 문체부 등에 ▲이미 작성된 블랙리스트 명단을 송부한 행위 ▲공모사업 진행 중 수시로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게 한 행위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워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고, 이를 인정한 원심에는 법리를 오해해 심리가 미진한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직권남용죄에서 말하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판시했다”며 “직권남용죄의 구성요건에 대한 법리해석을 명확하게 제시했다는 데 이번 판결의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합은 또 문예위·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다른 기관이고 연도별 사업도 다르기 때문에 원심이 인정한 ‘포괄일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아울러 원심이 이를 전제로 피고인들의 ‘공동정범’의 성립 범위를 판단한 것은 심리미진의 잘못이 있다고도 했다. 포괄일죄란 여러 개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하나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여 일죄(一罪)가 되는 경우를 말한다.

전합은 “원심은 문예기금 지원심의 등 부당개입, 2015년 예술영화지원사업 지원배제, 도서 관련 지원배제 전부를 포괄일죄로 인정하는 전제에서 전부에 관해 피고인의 공모와 기능적 행위지배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며 “그러나 문예위·영진위·출판진흥원 사이 및 각 연도별 사업 사이에는 포괄일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김 전 실장이 퇴임한 이후에는 직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퇴임 후 범행에 관해서는 직권남용죄의 공범으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며 “원심은 이 같은 사정을 심리한 다음 피고인의 공모와 기능적 행위지배가 미치는 범위를 확정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직권남용죄 성립에 대한 판단은 하급심에서 진행 중인 ‘국정농단’ ‘사법농단’ ‘청와대 선거개입’ 등 굵직한 사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전합은 직권남용죄가 다양한 사건에 적용돼 있는 만큼 이날 선고 결과가 미칠 파장 등을 감안해 다각도로 심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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